
도망치는 게 정말 나쁜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도망치는 행위 자체를 너무 가혹하게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는 스물다섯에 독립출판 기획자로 일하면서 이 질문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마주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개인적인 체험을 북페어 전시 텍스트로 선정하던 그 시기, 저 역시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도피의 허구성, 버드라는 인물이 폭로하는 것
오에 겐자부로는 1935년생으로, 일본 최초가 아닌 두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입니다. 도쿄대 불문학과 출신인 그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실제로 장애를 가진 첫 아들을 낳은 뒤 그 경험을 소설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소설의 주인공 버드는 27세의 남성으로, 대학원을 중퇴하고 학원 강사로 근근이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그의 가장 큰 꿈은 아프리카 여행입니다. 여기서 아프리카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닙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면, 이것은 시뮬라크르(simulacre)에 해당합니다. 시뮬라크르란 실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보다 더 실재처럼 느껴지는 이미지나 환상을 뜻하는 개념으로,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정교화한 용어입니다. 버드에게 아프리카는 실제로 가보지도 않았지만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은 가짜 안식처로 기능합니다.
아내가 출산하는 날, 버드는 병원이 아닌 서점에서 아프리카 지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아기가 뇌헤르니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통보받습니다. 뇌헤르니아란 두개골 밖으로 뇌 조직 일부가 돌출되는 선천성 신경관 결손의 일종으로, 수술 없이는 생존이 극히 어렵습니다. 이 사실을 접한 버드가 보이는 반응은 분노도 슬픔도 아닙니다. 그는 회피합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큐레이션 노트에 분석하면서 손이 멈췄던 기억이 납니다. 버드의 심리가 너무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펀딩이 실패하고 기획 전체가 흔들리던 시기, 저도 정확히 그 심리였습니다. "이건 어차피 안 된다"는 합리화를 찾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웠습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버드의 내면 서술에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는 심리학 개념이 그대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방어기제란 자아가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작동시키는 심리적 회피 전략을 말합니다. 버드는 아기가 어차피 식물인간이 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근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그 방어기제가 얼마나 비겁하고 또 얼마나 인간적인지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버드가 분유 대신 설탕물을 주는 방식으로 아기를 서서히 쇠약하게 만드는 의사의 계획에 공모하는 장면은 읽는 내내 숨이 막힙니다. 그는 자기가 직접 손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면죄하려 합니다. 그 기만을 소설은 끝없이 파고듭니다.
버드의 도피 심리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아프리카라는 시뮬라크르 공간을 통한 현실 탈출 욕망
- 의사의 말을 빌려 자신의 선택을 외부 권위에 귀속시키는 투사(projection)
- 직접 행위를 피하면서 결과만 바라는 수동적 공모
- 알코올과 성적 방종을 통한 감각적 마비
실존적 책임, 버드가 마침내 멈춰 선 자리
소설이 거의 끝나갈 무렵, 버드는 게이바에서 술을 마시다 갑자기 선언합니다. "나는 아기를 다시 데려와서 수술을 받게 할 거야." 이 장면은 처음 읽으면 다소 뜬금없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전환이 오에 겐자부로가 소설 전체에서 가장 치밀하게 준비한 대목이라고 봅니다.
버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기 괴물에게서 도망치는 대신 정면으로 맞서는 속임수 없는 방법은 자기 손으로 직접 목을 조르거나 아니면 그를 받아들여 기르는 것 두 가지뿐이야." 이 문장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윤리학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란 인간은 본질보다 먼저 존재하며, 따라서 자신의 선택과 행위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철학 사조입니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도 없다"고 했는데, 버드의 각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이루어집니다.
버드의 각성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아름답거나 영웅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고, 자기 행동의 결과로 체포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단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내 손으로 직접 죽인 거지. 나는 체포당해 마땅하고 내가 책임을 져야지." 이 대사는 낭만적 결단이 아니라 가장 처절한 형태의 주체성(subjectivity) 회복입니다. 주체성이란 외부 압력이나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기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제가 북페어 현장에서 독자들과 이 장면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을 때, 반응이 흥미롭게 갈렸습니다. 버드의 결단을 진정한 성장으로 보는 분들이 있었던 반면, "결국 책임을 진다는 게 그냥 선언 아니냐"고 회의적으로 보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후자의 시각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소설의 핵심은 버드가 성공적으로 책임을 완수하는 해피엔딩에 있지 않습니다. 도피라는 눈덩이가 굴러떨어지는 과정을, 그 모든 수치와 비열함을 90% 이상 집요하게 써 내려가다가 마지막에 딱 한 번 "나는 멈추겠다"고 말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할 말을 다 한다고 봅니다.
실제로 문학치료(bibliotherapy) 분야의 연구에 따르면, 주인공과 독자 사이의 정서적 동일시가 독자 자신의 심리적 회피 패턴을 인식하고 변화하는 데 유의미한 영향을 미칩니다(출처: 한국문학치료학회). 저도 그랬습니다. 버드의 비겁함을 읽으면서 제 안의 비겁함을 직면했고, 그것이 전시 기획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편, 오에 겐자부로는 이 소설 이후 피폭 피해자 문제와 아시아 지역의 평화 운동에 직접 참여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문학과 삶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노벨위원회의 수상 이유에도 명시되어 있는데, 노벨위원회는 그가 "시적 힘으로 인간 실존의 핵심을 형상화했다"고 밝혔습니다(출처: 노벨위원회 공식 사이트).
결국 개인적인 체험이 묻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당신은 자기 삶에서 도망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맞서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차이가 생각보다 얼마나 불분명한지를, 이 소설은 400페이지에 걸쳐 보여줍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분이라면 버드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발견 자체가 이미 도피를 멈추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