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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풍자 서사, 야후, 후이넘)

by 이초록 Chorock 2026. 5. 31.

이초록의 영미문학적 삶-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손글씨

솔직히 처음엔 저도 이 책을 아동용 모험 동화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소인국에 묶인 거인, 거인국에서 애완동물 신세가 된 인간. 거기까지가 전부인 줄 알았으니까요. 영문학 전공 수업에서 원전을 처음 펼쳤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이건 어린이 책이 아니라, 인간 문명 전체를 난도질하는 풍자 서사였습니다.

네 개의 공간이 폭로하는 문명의 위선

조너선 스위프트가 1726년에 발표한 걸리버 여행기는 단순한 모험담이 아닙니다. 외과의 레뮤얼 걸리버가 네 곳의 이색적인 세계를 항해하며 겪는 이야기인데, 각각의 공간이 18세기 영국 사회의 특정 병폐를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소인국 릴리퍼트에서 걸리버는 손가락만 한 12~15cm 크기의 인간들에게 묶인 채 깨어납니다. 이 나라의 권력 다툼은 계란을 넓은 쪽으로 깰 것인지, 좁은 쪽으로 깰 것인지를 두고 벌어집니다. 황제의 칙령 하나로 나라가 두 편으로 갈라져 전쟁을 치릅니다. 제가 이 장면을 처음 읽었을 때 실소가 터졌는데, 곧바로 서늘해졌습니다. 이게 허황된 소인국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영국 의회의 휘그당과 토리당 간 정쟁, 나아가 종교 분쟁을 그대로 빗댄 알레고리(Allegory)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레고리란 표면의 이야기 뒤에 다른 층위의 의미를 숨겨놓는 서사 기법으로, 직접적인 비판이 검열에 걸릴 때 작가들이 즐겨 쓰던 방식입니다.

그리고 관직을 얻는 방법이 외줄타기 실력으로 결정된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황제 앞에서 가장 높이 뛰고 가장 현란하게 재주를 부리는 순서대로 자리를 차지하는 겁니다. 제가 그 부분에서 멈추고 강의 노트에 밑줄을 세 번 그었던 기억이 납니다. 스위프트는 능력이 아닌 퍼포먼스로 선발되는 정치 시스템 자체를 조롱하고 있었던 겁니다.

거인국 브롭딩낙,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 그리고 말들의 나라 후이넘(Houyhnhnm)으로 이어지는 여정은 갈수록 날이 서집니다. 특히 라퓨타는 제가 수업에서 가장 오래 붙들었던 파트입니다. 이 떠다니는 섬의 지배층은 온종일 수학과 음악에만 몰두하느라 정작 눈앞에서 아내가 바람을 피워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위프트의 풍자가 겨냥한 지점, 이성(Reason)의 위기입니다. 당시 계몽주의(Enlightenment)가 이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찬양하던 시대였는데, 스위프트는 그 이성이 현실과 유리되는 순간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괴물로 변하는지를 라퓨타를 통해 보여줍니다. 여기서 계몽주의란 17~18세기 유럽에서 이성과 과학으로 인간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적 운동을 가리킵니다.

스위프트의 풍자가 겨냥한 핵심 표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소인국: 아무 의미 없는 명분을 내세워 벌이는 정치적 파벌 싸움과 종교 분쟁
  • 거인국: 거인 왕의 눈에 비친 영국 역사의 전쟁, 학살, 부패로 점철된 민낯
  • 라퓨타: 현실을 외면한 채 탁상공론에 빠진 지식인 계층과 과학 만능주의의 공허함
  • 후이넘: 이성과 덕성을 갖춘 말에 대비되는 인간의 본원적 야만성

야후와 후이넘, 그리고 걸리버의 실존적 위기

마지막 4부 후이넘 나라가 이 작품 전체의 핵심입니다. 제가 원전을 처음 읽으면서 가장 긴 시간을 붙잡고 있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이성과 덕성을 갖춘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말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형상을 한 존재는 야후(Yahoo)라 불리는데, 더럽고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짐승으로 그려집니다. 탈구조주의 비평(Post-structuralist Criticism)의 시각에서 보면, 야후는 문명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냈을 때 남는 인간의 무의식적 충동, 즉 라캉(Lacan)이 말한 대타자(the Other)의 기표(Signifier)로 읽힙니다. 여기서 기표란 의미를 담는 언어적 기호 자체를 가리키며, 야후라는 이미지는 인간이 억누르고 싶어하는 욕망의 상징이라는 뜻입니다.

걸리버는 후이넘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순수한 이성을 경험합니다. 그러다 그들에게 자기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는데, 말하면서 스스로 충격을 받습니다. 지난 100년의 역사가 전쟁, 학살, 권력 다툼, 부패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요. 제가 이 대목에서 직접 느꼈던 감정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학과의 제도적 평가 기준과 주변의 눈치 속에서 나만의 사유를 잃어가던 시기였는데, 걸리버가 자기 세계를 설명하면서 환멸을 느끼는 그 순간이 남의 이야기처럼 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걸리버는 인간들 사이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귀국 후 아내와의 식사조차 거부하고 마굿간 옆에서 말과 함께 사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납니다. 이것이 스위프트가 설계한 서사적 아이러니(Irony)입니다. 여기서 서사적 아이러니란 독자가 기대하는 결말과 실제 결말이 충돌하면서 더 큰 의미를 만들어내는 기법입니다. 인간을 가장 많이 이해한 존재가 인간 세계에서 가장 소외되는 결말, 스위프트는 이것이 바로 문명이라는 이름이 만들어낸 필연적 귀결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스위프트의 이 같은 비판적 서사 전략은 18세기 영국 문학 전통 안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합니다. 당시 풍자 문학의 흐름을 살펴보면,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나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의 작품도 사회 비판을 담고 있지만, 스위프트처럼 인간 종(種) 전체를 피고석에 세운 작가는 없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영문학계에서도 이 작품이 단순한 18세기 텍스트가 아니라 현대적 맥락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비판 서사임을 꾸준히 확인하고 있습니다. 풍자 문학이 가진 정치적 발화(Political Utterance)의 힘, 즉 직접 말할 수 없는 것을 우회해서 더 강하게 말하는 방식은 오늘날 미디어 비평이나 정치 풍자에서도 동일한 원리로 작동합니다(출처: 옥스퍼드 문학 온라인).

걸리버 여행기를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어릴 때는 소인국과 거인국의 스케일 차이가 재미있었다면, 지금은 그 크기 차이가 권력과 관점의 상대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스위프트가 300년 전에 던진 질문, "인간이 이성을 가졌다는 근거가 정말 있는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합니다. 원전으로 읽을 자신이 없다면 번역본부터라도 4부를 끝까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소인국에서 멈추지 마시고, 후이넘까지 가야 스위프트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만날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6nloQ8rPg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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