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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 (직접 경험, 간접 경험, 디지털 소외)

by 이초록 Chorock 2026. 6. 16.

이초록의 영미문학적 삶- 경험의 멸종 크리스틴 로젠 손글씨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느낌, 혹시 여러분도 경험해보셨습니까? 저는 어느 순간부터 밥 먹을 때도, 잠들기 직전에도, 줄을 기다리는 2분 동안에도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은 바로 그 불편한 자각을 정면으로 파고드는 책입니다.

직접 경험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정말 '겪고' 있는가

인간이 수백만 년에 걸쳐 쌓아온 경험의 방식은 단순했습니다. 특정 시간, 특정 공간 안에서 몸과 감각을 통해 무언가를 체험하는 것. 크리스틴 로젠은 이것을 직접 경험(direct experience)이라 부르며, 이 방식이 지금 급격히 소멸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저도 비슷한 고민을 전공 수업 시간에 처음 마주쳤습니다. 당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복수 전공하며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와 디지털 매체에 의한 주체 소외'를 다루는 세미나에서 이 책을 원전으로 읽었는데, 강의 텍스트를 모두 노트북 화면으로만 소비하면서 지식을 습득하고 있다고 착각하던 제 자신이 꽤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몸은 강의실에 있었지만, 사실 제 감각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저자가 특히 주목한 것은 "You had to be there"라는 영어 표현의 사용 빈도 변화입니다. 여기서 이 표현은 "네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해"라는 뜻으로, 직접 경험만이 가진 고유한 전달 불가능성을 함축합니다. 빅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이 표현은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꾸준히 증가했다가, 2012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공교롭게도 2012년은 미국에서 스마트폰 보급률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해입니다. 두 데이터 사이에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운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꽤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간접 경험의 과잉, 리액션 영상은 '경험 표절'인가

유튜브에서 음식 먹는 영상, 상자 뜯는 영상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 영상들이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라 '직접 경험의 대체물'이라는 분석을 처음 접했을 때 말입니다.

크리스틴 로젠은 이런 리액션 영상(reaction video)을 경험 표절(experience plagiarism)이라는 표현으로까지 비판합니다. 여기서 경험 표절이란 타인의 감각적 체험을 간접적으로 소비하면서 마치 스스로 경험한 것처럼 인식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설문 조사 결과, 53%가 스마트폰을 잃는 것보다 후각을 잃는 편을 선택했다는 수치는 단순한 통계가 아닙니다. 인간의 오감 중 하나를 포기하더라도 스크린을 손에 쥐겠다는 심리는, 이미 직접 경험보다 매개된 경험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신호입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떠올린 것은, 세미나 당시 책 읽기의 방식을 바꾸려 했던 시도였습니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수십 년 된 고서적을 사 모으고, 거친 종이 질감과 오래된 책 냄새를 의도적으로 느끼면서 읽으려 했습니다. 그게 당시엔 다소 유별나 보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직접 경험을 복원하려는 나름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조차 스크린을 통해 처리하다 보면, 지식의 내용만 남고 그 경험 자체는 어딘가로 사라진다는 느낌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현상학(phenomenology) 개념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상학이란 인간이 세계를 직접적인 감각과 몸을 통해 경험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철학적 방법론입니다. 스크린이 매개하는 경험은 이 현상학적 체험의 밀도를 근본적으로 희석시킵니다.

디지털 소외, 표정을 읽지 못하는 세대가 오고 있다

인간은 말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전달합니다. 상대방이 이 상황을 불쾌해하는지, 혹은 즐거워하는지를 표정 하나로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은 사실 오랜 사회적 학습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학습 기회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크리스틴 로젠은 이를 비언어적 소통(non-verbal communication) 역량의 퇴화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비언어적 소통이란 표정, 몸짓, 눈 맞춤 등 언어 이외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인간 사이의 소통 전반을 가리킵니다. 텍스트 기반의 온라인 소통에서는 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 자체가 없고, 화상 통화에서도 멀티태스킹을 하거나 화면 속 정보량이 직접 대면보다 현저히 적기 때문에 능력은 계속 녹슬어갑니다.

이 맥락에서 저는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가 남긴 말을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관심이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관대함이다." 타인의 표정에 관심을 두는 것, 그것이 사실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였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여러 기업 내 연구에서 서로 다른 팀 사람들이 우연히 마주쳐 나누는 비공식 대화가 창의적 성과로 이어지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습니다(출처: MIT 미디어랩). 픽사 스튜디오가 건물 중앙에 거대한 아트리움을 설계한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반면 많은 조직이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엘리베이터 동선까지 알고리즘화하면서 우연한 만남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소외(digital alienation)란 단지 개인이 스크린 앞에서 고립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디지털 소외란 물리적 공간 안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기적 연결이 기술에 의해 단절되는 현상 전체를 포괄합니다.

인간의 공공 공간 활용 방식에서도 이 변화는 뚜렷합니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넓은 광장에서 몇 명만 휴대폰 통화에 집중해도 군중 전체의 이동 흐름이 느려지고 엉킵니다. 타인이 발산하는 비언어적 신호를 읽지 못하면, 그것은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됩니다.

기억의 아웃소싱, 디지털 무덤만 남는 시대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예전에는 그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리고 손때 묻은 앨범 몇 권이 남았습니다. 지금은 인스타그램 계정과 틱톡 피드가 남습니다. 크리스틴 로젠은 이 현상을 디지털 무덤(digital grav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기억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기능마저 아웃소싱되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여기서 기억의 아웃소싱이란 개인이 스스로 기억을 내면화하고 보존하는 대신, 그 역할을 플랫폼 기업이 운영하는 서버에 위탁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그 서버와 플랫폼을 개인이 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억의 플랫폼 자체를 대기업이 소유하는 구조에서는, 그 기업이 정책을 바꾸거나 서비스를 종료하면 개인의 기억도 함께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미디어 생태학(media ecology)의 시각이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미디어 생태학이란 미디어가 인간의 인식, 감각, 사회적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생태계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학문입니다. 매체가 달라지면 그 안에서 형성되는 기억의 질감과 통제권도 달라집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은 '내 기억'이라기보다 플랫폼의 데이터베이스 안에 저장된 정보에 가깝습니다.

이 책이 지적하는 디지털 공간의 문제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직접 경험이 간접 경험(리액션 영상, 먹방 등)으로 대체되며 감각적 체험의 밀도가 낮아진다
  • 텍스트 기반 소통이 거짓말 장벽을 낮춰, 온라인 환경에서 기만이 더 쉽게 발생한다
  • 기억의 통제권이 개인에서 플랫폼 기업으로 넘어가면서 자아 정체성의 기반이 흔들린다
  • 장소에 대한 감각이 약화되고, 온라인 프로필이 물리적 장소를 대체하는 정체성의 기반이 된다

개인이 자신을 브랜드화하고 경험을 업로드하기 위해 경험하는 역설도 같은 맥락입니다. 저자는 "인간은 스스로의 광고가 되었다"고 씁니다. 이 문장은 수사학적 과장이 아닙니다. SNS에서 음식 사진을 찍고, 여행지에서 셀카를 올리는 행동이 경험 자체보다 경험의 재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로 많은 현대인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진단입니다. 기억마저 광고 소재가 되는 시대에서, 고유하고 내밀한 경험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출처: Pew Research Center).

저자의 결론이나 처방, 예컨대 중학교 2학년 이전 아이에게는 휴대폰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저와는 조금 다른 생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불편하게 만드는 질문들, '나는 지금 정말 경험하고 있는가, 아니면 경험을 연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오래 남았습니다.

결국 이 책이 가장 강하게 남긴 것은 처방이 아니라 질문이었습니다. 직접 경험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에 인간이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크린 바깥에서 찾아보고 싶다면, 이 책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저처럼 디지털 안에 너무 오래 있다고 느끼는 분이라면, 읽는 내내 꽤 여러 번 찔릴 각오를 하고 펼치시면 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BW8_53HmV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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