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앞두고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던 시절, 저는 하루하루를 막연히 버티고 있었습니다. 취업이 될지, 어디로 가야 할지, 기다려야 하는 게 맞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 해 겨울 학기에 처음 펼쳐든 베케트의 희곡은, 이상하게도 그 막막함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
일반적으로 희곡이라고 하면 사건이 있고, 갈등이 있고, 해소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읽었을 때 그 전제가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고도를 기다릴 뿐이고, 고도는 오지 않습니다. 1막과 2막의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고, 인물들은 같은 장소에 다시 나타납니다. 처음엔 작가가 독자를 우롱하는 건가 싶었을 정도였습니다.
이 작품은 부조리극(Theatre of the Absurd)으로 분류됩니다. 부조리극이란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과 소통 불가능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연극 장르로, 논리적 서사 구조 대신 반복과 침묵, 언어의 해체를 통해 실존적 공허를 표현합니다. 알베르 카뮈가 철학적으로 정의한 '부조리(absurd)'를 연극적 형식으로 구현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가장 정확합니다.
강의실에서 저는 동기들과 함께 베케트의 대본에 표기된 '침묵(Pause)'이라는 지시어가 갖는 기호학적 기능을 분석했습니다. 기호학(Semiotics)이란 기호와 그것이 생산하는 의미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대사가 없는 순간, 즉 침묵 자체가 하나의 기호로 작동하면서 오히려 가장 많은 것을 말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저는 이 희곡이 단순히 '어렵고 난해한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제가 직접 원전을 읽으며 느낀 건, 언어가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공백을 메우기 위한 필사적인 몸짓처럼 느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포조와 럭키라는 인물도 처음엔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솔직히 이 두 사람이 가장 불편했습니다. 럭키의 목에 끈을 매달고 끌고 다니는 포조는 혐오스럽지만, 블라디미르도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 무력함이 현실처럼 느껴졌습니다. 럭키에게 모자를 씌우면 그는 체계 없는 말을 쏟아내는데, 이는 지식 체계가 붕괴된 상태를 상징합니다. 합리주의(Rationalism), 즉 이성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근대적 믿음이 실은 모자를 쓰고 있을 때만 유지되는 허상일 수 있다는 것을 베케트는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 하나로 드러냅니다.
이 작품이 세계 50여 개국에서 번역되고 지금도 공연된다는 사실은, 이 기다림의 감각이 특정 시대나 문화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반증합니다. 연극과 공연 연구 분야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가진 영향력은 학술적으로도 꾸준히 다뤄지고 있습니다(출처: 국립국어원 문학 용어 사전).
기다리는 동안에도 인간은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이 작품을 허무주의적 텍스트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해석이 절반만 맞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끝내 움직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매일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납니다. 그 반복 자체가 저에게는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집요한 생존 의지로 읽혔습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가 누구인지조차 모릅니다. 베케트 본인도 고도가 누구냐는 질문에 "알았더라면 작품 안에 썼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 열린 텍스트 구조는 독자 반응 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의 핵심적인 사례로 자주 인용됩니다. 독자 반응 비평이란 텍스트의 의미가 작가가 아닌 독자의 경험과 맥락 속에서 완성된다는 이론입니다. 졸업을 앞두고 막막했던 저에게 고도는 '취업'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신이,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 됩니다. 그게 이 작품이 70년 넘게 살아남은 이유일 겁니다.
제 경험상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독서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고도를 규정하려는 순간, 텍스트가 주는 긴장감이 사라집니다. 규정하지 않고 그 불확실성 안에 머무는 것이 베케트가 독자에게 요청하는 태도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으면서 눈에 들어온 또 다른 장치는 나무입니다. 잎이 없고 죽은 듯 보이지만, 2막이 되자 잎이 돋아 있습니다. 목을 매달기엔 너무 약하고, 몸을 숨기기엔 너무 작습니다.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도 두 사람은 끊임없이 그 나무를 의식합니다. 이 장치 하나가 실존주의(Existentialism)에서 말하는 '존재와 부재의 공존'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베케트의 무대 구성이 얼마나 치밀한지 알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이 사전에 부여된 본질 없이 존재하며,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베케트가 이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1969년의 일입니다. 그는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후 일체의 인터뷰도 거절했습니다. 그 침묵마저 작품과 일관된 태도처럼 느껴집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목록과 수상 경위는 스웨덴 한림원 공식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처: 노벨 위원회).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기 전 알아두면 도움이 되는 배경 지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사무엘 베케트는 아일랜드 출신이며 프랑스어로 이 작품을 먼저 집필했습니다.
- 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고, 피신 생활의 경험이 작품의 정서에 반영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 1953년 초연 이후 현재까지 세계 50여 개국에서 공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 주인공 두 사람의 이름 블라디미르(슬라브계)와 에스트라공(프랑스어권)은 문화적 경계를 넘는 보편성을 의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희곡을 처음 접할 때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읽어야 하나"는 생각이 드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집요하게 의미를 만들어내려 하는지를, 베케트는 의미가 없는 텍스트로 역설적으로 증명합니다. 읽고 난 뒤 자신이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권합니다. 고도가 무엇인지 스스로 답해보는 그 순간이, 이 작품이 진짜로 시작되는 지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