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스물다섯 살 때까지 명언을 꽤 신봉하는 편이었습니다. 누군가 SNS에 올린 문장에 감동받고, 그걸 노트에 적고, 마치 그 말이 제 삶을 구원해 줄 것처럼 믿었습니다. 그러다 영문학과 비교문학 세미나에서 이 소설을 처음 텍스트 분석 대상으로 만난 뒤로, 명언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홍차 티백 꼬리표 하나에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불편하고, 그래서 더 오래 남는 책입니다.
명언 출처, 실제로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이 소설의 핵심 설정은 단순합니다. 일본 최고의 괴테 연구자가 결혼기념일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홍차 티백 꼬리표에 적힌 문장 하나를 발견합니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출처는 괴테. 그런데 평생 괴테만 연구해 온 학자가 생전 처음 보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출처 찾기 여정이 시작되죠.
제가 세미나에서 이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개념이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었습니다. 상호텍스트성이란 모든 텍스트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텍스트들을 인용하고 흡수하면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완전히 새로운 문장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소설 속 괴테가 꿈에서 하는 말이 이걸 정확히 짚습니다.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고, 우리는 기껏해야 그것을 다른 형식이나 표현으로 되풀이할 뿐이야."
소설은 명언의 유통 방식을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 요약형: 원래 문장이 단순화되거나 자의적으로 재해석되면서 뜻이 뒤바뀌는 경우
- 전승형: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출처가 바뀌거나 뒤섞이는 경우
- 위작형: 아예 처음부터 날조된 경우. 마리 앙투아네트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가 대표적입니다
제가 세미나 발제문을 준비하면서 실제로 확인해 보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명언 상당수가 이 세 가지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학술 연구 분야에서도 잘못된 인용이 반복 재생산되는 문제는 오래된 과제입니다. 미국심리학회(APA)는 학술 글쓰기 가이드에서 출처 불명 인용의 위험성을 명시적으로 경고하고 있을 정도입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
그런데 소설에서 진짜 불편해지는 지점은 따로 있습니다. 시카리 교수가 저지른 일입니다. 그는 자신의 논문과 저서 전반에 걸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썼다고 주장하는 문헌을 인용해 왔습니다. 전형적인 텍스트 위조(text fabrication), 즉 학술 문서에서 인용 자체를 날조하는 행위입니다. 해임 이후 그가 남긴 말이 묘하게 설득력 있습니다. "학문이란 실패와 오류의 연속이다. 요즘 시대에는 실패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제가 크게 실패해 드렸습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세미나에서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저는 이 주장을 완전히 옹호하기는 어렵다고 봤지만, 인용과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만큼은 유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리지널리티란 창작이나 학문에서 기존의 것을 단순 모방하지 않고 독자적인 사유와 표현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성질을 뜻합니다.
인용이냐, 나의 언어냐
소설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대화가 하나 있습니다. 노리카가 어느 모임에서 계속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자 그녀의 남자 친구가 한마디 합니다. "그렇게 인용만 하지 말고, 너의 언어로 말해 보지 그래?" 노리카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원래 언어 시스템 자체가 인용이야."
솔직히 이 대목에서 저는 멈췄습니다. 당시 저도 전공 학점 압박과 논문 작성에 치이면서 정작 제 생각이 뭔지 분간이 안 되는 상태였거든요. 수업 시간에 하는 말도, 발제문에 쓰는 문장도, 교수님이 언급한 이론을 재배열한 것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이 있었습니다. 노리카의 반격이 위로처럼 들렸던 게 솔직한 반응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비단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이론에서 핵심 개념으로 다루어지는 시뮬라크르(Simulacra)가 여기서 겹칩니다. 시뮬라크르란 원본 없는 복제, 즉 실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유통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철학자 보드리야르가 이 개념을 정립했는데, 지금 우리가 SNS에서 접하는 수많은 명언 이미지들이 정확히 이 상태입니다. 누가 말했는지, 원문이 맞는지, 맥락이 살아 있는지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채로 유통됩니다.
이 소설이 쓰인 맥락을 생각하면 더욱 씁쓸해집니다. 실제로 AI가 생성한 가짜 인용문이 학술 논문에 그대로 실리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으며, 학계에서는 이를 심각한 연구 윤리 문제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연구재단도 연구 윤리 지침에서 AI 생성 콘텐츠의 무검증 인용을 부적절한 연구 행위로 명시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연구재단).
소설의 클라이맥스에서 도이치가 TV 프로그램 녹화 중 출처 불명의 문장을 "괴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단순한 일탈이 아닙니다. 그는 녹화 후 구역질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해방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떠올린 건, 정확한 인용에 집착하다 정작 자신이 진심으로 믿는 말을 못 하게 된 학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인용의 강박이 어느 순간 자기 목소리를 잃게 만드는 역설 말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잡탕'이라는 술집과 거기서 파는 잡 칵테일, 그리고 몇 분이 빠른지 느린지 알 수 없는 시계까지, 작가는 작중 곳곳에 이 혼재된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상징하는 장치들을 심어뒀습니다. 제가 직접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이 상징들을 하나씩 짚어낼 때, 2001년생 작가가 설계한 구조적 치밀함에 솔직히 놀랐습니다.
이 소설은 명언의 출처를 찾는 추리물처럼 읽히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무언가를 인용할 때마다 암묵적으로 내리는 판단들을 건드립니다. 이 출처가 맞는가, 이 말이 정말 그 사람이 한 말인가, 그리고 그게 맞더라도 그 말이 내 삶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무엇이 더 필요한가. 읽고 나서 제가 결론 내린 건 이겁니다. 인용의 정확성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말을 꺼내는 사람의 진심이라는 것. 도이치가 방송에서 그 문장을 말하던 순간 "자신만큼은 진짜였다"고 느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으셨다면, 술술 읽히는 가벼운 소설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처음 세미나 과제로 읽을 때 꽤 느린 속도로 읽었습니다. 하지만 덮고 나서도 한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는 책이 있다면, 이 소설이 그런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