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황하던 시절, 손에 잡힌 책이 정대건 작가의 『급류』였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그냥 유행 타는 소설이겠거니 했는데, 읽기 시작하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상실과 죄책감을 끌어안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두 청춘의 이야기가, 당시 제 안의 무언가를 정확히 건드렸습니다.
트라우마를 공유한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서사
이 소설의 출발점은 꽤 묵직합니다. 진평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존경받던 소방관 창석은 계곡 사고 구조에 능해 '진평 물개'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물에서 죽습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이웃집 아들 해솔의 어머니를 껴안은 채로 시신이 발견됩니다. 불륜 관계였던 두 사람이 함께 익사한 겁니다. 창석의 딸 도담이는 어머니가 병실에 누워 있던 그 시간에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죽었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니, 이 사건이 단순한 '막장 설정'이 아니라는 걸 바로 느꼈습니다. 작가는 이 충격적인 사건을 두 인물의 심리 변화를 이끄는 촉매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트라우마(trauma)란 단순한 심리적 상처를 넘어, 이후 삶 전반의 행동 양식과 관계 패턴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심층적 상흔을 의미합니다. 도담과 해솔은 이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정반대입니다.
도담은 회피형입니다. 겉으로는 당차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 기억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 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술과 클럽으로 채우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제 눈에는 그게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잊고 싶은 사람이 취하는 전형적인 회피 기제(defense mechanism)처럼 보였습니다. 여기서 회피 기제란 고통스러운 감정이나 기억을 의식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다른 행동으로 덮어버리는 심리적 방어 전략을 말합니다. 반면 해솔은 그 문제를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해결하려 합니다. 유약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내면이 단단한 이 캐릭터가, 읽는 내내 오히려 더 강한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트라우마 반응 유형에 관한 연구에서도 이 두 패턴은 자주 언급됩니다. 회피와 직면은 외상 후 스트레스 반응의 대표적인 양극단입니다(출처: 국립정신건강센터). 소설이 이 심리적 구도를 꽤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급류』가 보여주는 이 두 인물의 핵심적인 대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도담: 외면적으로 강하지만 내면의 상처를 회피하며, 유흥과 관계의 반복으로 고통을 지운다
해솔: 겉으로 유약해 보이지만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해소하려는 주도적 의지를 가진다
두 사람: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며 14년에 걸쳐 서로를 잃고 다시 찾는 과정을 겪는다
감성 리얼리즘이 그려낸 성장 서사의 완성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부분은, 두 사람이 나쁠 때 얼마나 처절하게 나쁜가 하는 지점이었습니다. 소설 속 문장처럼 "좋을 때 두 사람은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지만, 나쁠 땐 한없이 나빴다"는 그 감각이 읽는 내내 손에 잡혔습니다. 이게 왜 요즘 독자들 사이에서 역주행하는지, 그때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작가는 감성 리얼리즘(emotional realism)이라는 서술 방식을 취합니다. 감성 리얼리즘이란 인물의 내면 감정과 심리 변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독자의 정서적 공명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서사를 구성하는 기법입니다. 쉽게 말해 "이 장면, 나도 저런 적 있었는데"라는 감각을 만들어내는 글쓰기 방식입니다. 정대건 작가는 급류라는 자연 이미지를 서사 전반에 메타포(metaphor)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메타포란 특정 개념이나 감정을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어 독자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수사 기법을 말합니다. 물살은 통제할 수 없는 운명과 감정의 은유이고, 수영은 그 안에서도 살아남으려는 의지의 상징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소설이 오래 남는 이유는,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인물들의 선택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기 때문입니다. 도담이 왜 그렇게 도망쳤는지, 해솔이 왜 끝까지 붙들려 했는지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방황하던 그 시절, 이 소설에서 "상처를 부정하거나 매끄럽게 봉합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배웠습니다. 불완전한 채로 버티고, 그 버팀이 결국 성장이 된다는 서사가 저를 꽤 오래 붙잡았습니다.
성장 서사(coming-of-age narrative)라는 장르 개념도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 돌아보게 됐습니다. 성장 서사란 인물이 외적 사건보다 내면의 변화와 자아 인식의 심화를 통해 성숙해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야기 형식입니다. 『급류』는 17살에서 시작해 14년 뒤까지 이어지는 긴 호흡으로 그 성장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단순히 아픔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아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라는 점이 설득력 있었습니다.
한국문학진흥원이 발표한 최근 독자 조사에 따르면, 20~30대 독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서사 유형 중 하나가 바로 실존적 고통과 관계의 회복을 다루는 감성 문학입니다(출처: 한국문학진흥원). 『급류』가 역주행하는 맥락도 그 흐름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급류』는 가볍게 읽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무게가 독자를 짓누르기보다는, 읽고 나서 뭔가 단단해지는 느낌을 줍니다. 방황하던 시절 제가 이 책에서 받은 위로가 바로 그 감각이었습니다. 상처를 품은 채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소설입니다. 읽고 나서 도담과 해솔 중 자신이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꽤 오래 여운이 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