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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마르크스주의 비평, 소외, 재개발)

by 이초록 Chorock 2026. 5. 21.

이초록의 영미문학적 삶-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손글씨

솔직히 저는 이 소설을 처음 교과서에서 마주했을 때 그냥 '수능에 나오는 작품'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정해진 해설, 정해진 감상, 정해진 답. 그런데 영문학 전공 수업에서 원전을 다시 손에 쥐는 순간,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한 번 읽을 때마다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소설입니다.

마르크스주의 비평으로 읽은 난장이 가족의 소외

제가 이 소설을 제대로 마주한 건 영문학과 '마르크스주의 비평과 근대 노동 문학' 수업에서였습니다. 당시 저는 찰스 디킨스의 빅토리아 시대 소설로 영국 산업화의 인간 소외를 탐구한 직후였고, 같은 시각을 한국 문학에 대입하는 작업이 주어졌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그 과정이 단순한 비교문학 실습이 아니었습니다. 텍스트를 파고들수록 가슴 어딘가가 무거워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비평(Marxist Literary Criticism)이란 계급 갈등과 생산 수단의 소유 관계를 중심으로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론입니다. 쉽게 말해, 누가 무엇을 소유하고 누가 착취당하는지를 텍스트 안에서 추적하는 읽기 방식입니다. 이 렌즈를 끼고 난쏘공을 보면, 난장이 가족에게 날아든 철거 계고장은 단순한 행정 문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 권력이 법적 절차라는 형식을 빌려 인간의 생존권을 상품화하는 기표(Signifier)로 작동합니다. 기표란 기호학에서 의미를 담는 형식적 껍데기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합법적 철거'라는 외피 아래 폭력이 숨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키 117cm, 몸무게 32kg의 아버지는 평생 채권 매매와 칼갈이를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가족 모두가 인쇄소와 공장에서 땀을 흘렸지만 가난은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조세희는 이 가족의 내력을 천 년 전 조상까지 끌어올려 설명합니다. 노비제 폐지 이후에도 자립 기반이 없었던 탓에 대물림된 구조적 빈곤, 즉 재생산(Reproduction)의 문제를 직격합니다. 재생산이란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에서 불평등한 계급 구조가 세대를 넘어 반복되는 메커니즘을 가리킵니다.

제가 강의 노트에 이 장면들을 채워 넣으면서 느낀 서글픔은, 사실 책 속 이야기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저는 학과 경쟁 시스템 속에서 낙오하지 않으려 스스로를 몰아붙이면서 정작 제 내면의 목소리를 잃어가던 시기였습니다. 난장이 가족이 '일정한 구역 안에서 보호를 받는 이질 집단'처럼 외부로 나갈 수 없다고 느끼는 장면이 유독 오래 눈에 밟혔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이 1970년대 노동 문학의 맥락에서 유독 날카롭게 읽히는 이유는, 황석영의 객지나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달리 서사 자체를 세 남매의 시점으로 분절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영수, 영호, 영희가 각각 화자가 되는 구조는 당시 문예지에 연재된 단편들을 한 권으로 묶은 방식인데, 이것이 오히려 모더니즘 소설의 다성성(Polyphony), 즉 단일한 진실이 아닌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1978년 출간 후 동인문학상을 받았고, 군사정권 시절 금서로 지정될 만큼 당대 사회의 급소를 건드린 작품이었습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재개발이라는 폭력과 영희의 선택이 말하는 것

소설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었던 장면은 영희의 선택입니다. 열일곱 살 영희는 집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입주권을 25만 원에 사간 남자의 아파트로 스스로 들어갑니다. 가족을 위해, 그 남자의 금고 안에 있는 입주권을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제 경험상 이 장면을 단순히 '희생'으로 읽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게 텍스트의 절반만 읽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희의 행동은 소외된 주체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법 안에서 유일하게 행사할 수 있는 대항의 형태입니다. 그녀는 법도, 노동도 아닌 몸과 지략으로 가족의 공간을 탈환합니다. 어느 날 밤 금고를 열어 입주권과 돈을 꺼내고, 아버지 이름이 찍힌 매매 용지를 찢어버리는 이 행위는, 가부장적 자본 권력이 서명 위에 세운 소유 질서를 문자 그대로 파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희가 동네로 돌아왔을 때 집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아버지는 벽돌 공장 굴뚝 속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저는 이 결말이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 도구적 이성이 낳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읽습니다. 도구적 이성(Instrumental Reason)이란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제기한 개념으로, 효율과 성과 중심으로만 작동하는 근대적 합리성이 인간적 가치를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현상을 말합니다. 난장이가 굴뚝 꼭대기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달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 이성의 세계가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인간의 꿈을 상징합니다.

이 소설이 2017년 문학 서적 최초로 300쇄를 찍었다는 사실은, 조세희 작가의 말처럼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는 증거로 읽힙니다. 작가는 2008년 인터뷰에서 소설이 30년 후에도 읽힐 줄 몰랐다며, 미래의 아이들도 여전히 이 소설 앞에서 눈물 지을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재개발 지역의 이익은 특정 집단에게 집중되고, 정보 비대칭과 자본력의 차이가 입주권 매매 구조에서 반복됩니다. 1970년대 경기도 광주 대단지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이 소설이 여전히 현재형으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난쏘공의 핵심 상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달: 자본주의 현실 너머에 있는 소외된 자들의 유토피아적 욕망
  • 쇠공: 현실의 중력을 거스르려는 무력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의지
  • 굴뚝: 산업화의 폭력과 그 아래 죽어간 노동자의 육체
  • 팬지꽃: 영희가 짊어진 아름다움과 생존 사이의 아이러니한 대비
  • 입주권: 인간의 거주권이 상품 교환 가치로 치환되는 자본 권력의 표상

노동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원주민 재정착률은 1990년대 이후에도 20~30%대에 머문 경우가 많았습니다(출처: 한국노동연구원). 난장이 가족이 겪은 것이 문학적 과장이 아니라 통계로도 확인되는 현실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싶다면, 수능 해설집이 아닌 원전 소설집을 손에 쥐시길 권합니다. 13편의 단편이 서로를 증언하는 방식으로 엮여 있어, 어느 편에서 시작하든 결국 난장이 가족의 세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제가 처음 읽었을 때 느낀 그 서글픔은, 사실 이 소설이 묻는 질문에 대한 제 첫 번째 솔직한 대답이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얼마나 오래 기억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XDv-FYxQZ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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