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졸업을 앞두고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던 시절,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게 지금 트렌드에 맞나?'를 반복적으로 되물었습니다. 버려진 책을 해체해서 새로운 오브제를 만드는 업사이클링 북아트 작업이 정말 좋았지만, 그 좋음을 숫자로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그즈음 다시 펼쳐 든 것이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었습니다. 35년간 폐지 압축기 앞에 서 있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속도와 효율에 짓눌려 있던 저를 정면으로 흔들어 놓았습니다.
체코 문학의 숨겨진 거장, 흐라발을 먼저 알아야 하는 이유
보후밀 흐라발은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함께 20세기 체코 문학의 중심에 놓이는 작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카프카는 독일어로, 쿤데라는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지만 흐라발은 끝까지 체코어를 고집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정작 체코인들 사이에서는 카프카나 쿤데라보다 흐라발이 훨씬 친근하게 받아들여진다고 합니다.
흐라발은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지식인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 정권이 대학을 폐쇄하면서 법률가의 길을 잃었습니다. 이후 철도 수송공, 보험 설계사, 폐지 압축 노동자 등을 전전하며 살았는데, 이 경험이 고스란히 그의 문학 세계를 구성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보다는, 그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일상과 존엄을 담아내는 방식으로 글을 썼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 상당수는 검열을 받거나 지하 출판, 즉 사미즈다트(samizdat) 방식으로 유통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미즈다트란 소련 및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정부 검열을 피해 비밀리에 텍스트를 복사·배포하던 자생적 출판 방식을 의미합니다.
저는 처음에 흐라발을 단순히 노동 문학의 작가로 분류하는 시각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작품을 전시 기획의 서사 지침서로 삼아 정밀하게 분석해 보니 그것은 너무 좁은 틀이었습니다. 그는 노동 현장을 배경으로 삼되, 거기서 인간 내면의 지성사를 끌어올리는 작가였습니다.
한탸가 지하실에서 증명한 것, 실존적 저항의 의미
소설의 주인공 한탸는 35년째 지하 압축장에서 폐지를 압축하는 노동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종이를 찌그러뜨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책을 건져 올리고, 압축 꾸러미 한가운데 괴테나 니체를 올린 채 렘브란트나 클림트의 복제화로 포장합니다. 그에게 이 작업은 단순 노동이 아니라 일종의 의례(ritual)입니다. 여기서 의례란 반복되는 행위에 상징적 의미와 신성한 가치를 부여하는 문화적 행위를 말합니다. 한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하실에서 매일 자신만의 의례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북아트 작업을 하면서 버려지는 책들과 가장 가까이 있었을 때, 이 장면이 유독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제지 공장으로 보내진 폐지 꾸러미 속 니체의 문장을 아는 사람은 오직 한탸 한 명입니다. 이 사실이 허무하지 않고 오히려 숭고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저는 작업실에서 헌책 냄새를 맡으며 한참 생각했습니다.
도구적 합리주의(instrumental rationalism)라는 개념이 이 지점에서 유효합니다. 도구적 합리주의란 모든 행위와 사물의 가치를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척도로만 판단하는 사고방식을 가리킵니다. 한탸의 지하실은 도구적 합리주의의 논리에서 보면 완전히 비효율적인 공간입니다. 초과 근무를 하고 토요일에도 나와 꾸러미를 예술작품처럼 만들지만, 그것은 화물 열차에 실려 공장 용액에 녹아 없어집니다. 그럼에도 한탸는 멈추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실존적 저항의 가장 조용하고 강력한 형태라고 봅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봐야 가치 있는 행위만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이 소설이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탄생했다는 점도 놓치기 어렵습니다. 체코 공산주의 정권 시기(1948~1989)에 실제로 수많은 지식인들이 본업을 빼앗기고 하수구 청소나 막노동을 강요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출처: 체코 국립도서관). 흐라발은 그 씁쓸한 현실을 블랙유머로 녹여 냈고, 한탸는 그 체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내면을 가진 인간의 표상이 됩니다.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형용모순, 이 제목이 정확한 이유
이 소설의 제목에서 가장 먼저 걸리는 것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표현입니다. 고독하면 조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것이 첫 반응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형용모순(oxymoron), 즉 의미상 서로 모순되는 두 개념을 병치시키는 수사법이 얼마나 정확한지 실감하게 됩니다.
한탸의 고독은 결코 조용하지 않습니다. 압축기는 굉음을 내고, 천장 통로에서는 소장이 고함을 지릅니다. 지하실에는 쥐 떼와 파리 떼가 우글거립니다. 소설 후반부에는 거대한 기계화 공장이 들어서면서 한탸의 방식이 구식으로 밀려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유니폼을 입은 노동자들이 콜라를 마시며 폐지의 의미 따위는 생각하지 않은 채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 있는 그 광경은, 한탸의 세계가 얼마나 큰 소음 속에 있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소설에는 한탸가 젊은 시절 잠깐 함께했던 집시 여인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열쇠도 없이 한탸가 귀가하면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따라 들어오고, 아침이 되면 어느새 사라져 있던 여인. 어느 날 그녀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 알아보니, 게슈타포가 다른 집시들과 함께 그녀를 잡아 소각로에 태워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에피소드는 단 몇 줄에 불과하지만, 소설 전체에 흐르는 상실과 폭력의 그림자를 단번에 응축합니다. 고독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런 기억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버려지는 책과 북아트, 한탸에게서 배운 것
저는 대학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전공하면서 폐기 도서와 훼손된 헌책을 업사이클링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전시 기획안을 쓸 때 이 소설을 서사 지침서로 삼았는데, 그 과정에서 정신분석학의 실재계(the Real) 개념과 연결해 한탸의 행위를 분석한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여기서 실재계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서 언어와 상징 질서로는 포착되지 않는 날것의 현실 영역을 가리킵니다. 한탸가 폐지 더미 속에서 건져 올리는 책들은, 효율성과 숫자로만 돌아가는 세계의 언어가 포착하지 못하는 실재와 닿아 있다는 것이 제 해석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전시를 준비하던 동료들과 이 소설을 두고 치열하게 토론했는데, 한탸의 행위를 낭만적 도피로 보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지하실 의례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의견도 이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르게 봤습니다. 한탸는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태도 자체가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가장 단단한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탸가 꿈꾸는 미래는 소박합니다. 5년 뒤 은퇴할 때 압축기를 함께 가져가, 하루에 꾸러미 하나만 정성스럽게 만드는 것. 조각가처럼 살겠다는 꿈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속도에 짓눌려 있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동유럽 문학의 맥락을 좀 더 폭넓게 살펴보고 싶다면,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문학 자료 페이지에서도 참고할 수 있습니다(출처: UNESCO).
이 소설을 모든 독자가 좋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화려하고 빠른 서사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세상의 소음 속에서 조금이라도 자신만의 고독을 지키고 싶은 분이라면, 한탸의 지하실은 분명 따뜻한 은신처가 되어 줄 것입니다. 흐라발이 체코어로 지켜낸 그 언어의 무게만큼, 이 소설이 건네는 질문도 오래 남습니다. 지금 당신 내면의 압축기는 무엇을 짓누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