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을 만나려면 반드시 성지에 가야 할까요?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이 질문을 처음 마주했을 때, 저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단편 [두 노인]을 수업에서 파고들면서 제가 가진 전제가 완전히 흔들렸습니다. 신을 찾아 먼 길을 떠난 두 노인 중 정작 더 가까이 신에게 닿은 사람은 성지에 도착하지 못한 쪽이었으니까요.
종교적 형식주의가 놓치는 것들
저는 당시 '19세기 러시아 문학과 후기 빅토리아 시대 도덕주의 소설 비교 비평' 수업에서 이 작품을 분석했습니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과 톨스토이를 나란히 놓고 읽다 보니 하나의 공통 구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종교적 형식주의(Religious Formalism)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종교적 형식주의란 신앙의 본질보다 의식, 규칙, 절차를 우선시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교회에 빠짐없이 나가고 금식을 철저히 지키지만, 정작 눈앞의 굶주린 이웃은 외면하는 모습이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소설 속 엘리세이가 딱 그랬습니다. 그는 기도를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고 성경 말씀을 하나하나 지키려 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사흘째 굶고 있는 집 앞에서 그가 한 말은 "우리는 서둘러야 하오"였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강의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묘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 불편함의 정체를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서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킨스가 해부한 빅토리아 시대 영국 기독교 사회의 위선, 즉 자선을 공개적으로 행하면서 실제 고통받는 빈민은 외면하는 중산층의 이중성과 엘리세이의 태도가 구조적으로 겹쳐 보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사회학적 비평(Sociological Criticism)의 시각을 빌려왔습니다. 사회학적 비평이란 문학 작품을 당대의 사회 구조와 계층 관계 속에서 읽어내는 방법론입니다. 이 렌즈로 보면 엘리세이가 집착하는 예루살렘 순례는 단순한 신앙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경건함을 증명하려는 사회적 기표(Signifier)로 읽힙니다. 기표란 기호학에서 의미를 담는 외적 형식, 즉 내용보다 겉모습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성지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그 여정에서 무엇을 실천했느냐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리는 구조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수업 초반에 엘리세이를 단순한 악인이나 위선자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신을 믿는 사람이었고, 규칙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확신이 문제였습니다. 거대한 명분 앞에서 눈앞의 현실을 유예하는 것, 이것이 톨스토이가 해부하려 했던 종교적 형식주의의 핵심 맹점입니다.
톨스토이 후기 사상에서 이 주제는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의 형식적 의례를 강하게 비판했고, 실제로 1901년에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두 노인]을 다시 읽으면 엘리세이를 향한 작가의 시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가 더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실존적 자비가 닿는 진짜 예루살렘
예프렘이 머문 오두막을 저는 수업 발표에서 "진짜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습니다. 교수님이 눈썹을 약간 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표현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프렘의 선택은 즉흥적인 감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이의 눈빛을 보는 순간, 평생 모은 순례 자금 전부를 꺼내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을 정신분석학 비평(Psychoanalytic Criticism)으로 읽으면 흥미로운 층위가 생깁니다. 정신분석학 비평이란 인물의 무의식적 욕망과 내면 갈등을 중심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법론입니다. 이 관점에서 예프렘이 순례 자금을 포기하는 행위는 초자아(superego)가 요구하는 의무, 즉 "신과의 약속"을 자아(ego)가 현실 앞에서 재조정하는 순간으로 읽힙니다. 그리고 그 재조정의 방향이 자기희생 쪽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톨스토이는 이것을 진정한 신앙의 발현으로 제시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선택은 실제 삶에서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저 역시 전공 과정 내내 학점과 스펙이라는 거대한 목적지를 향해 달리면서, 주변 사람들의 사소한 신호들을 얼마나 많이 흘려보냈는지 떠올리면 지금도 씁쓸합니다. 예프렘이 멈춰 선 그 갈림길이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예프렘이 실천한 것을 톨스토이 연구자들은 흔히 아가페(agape)적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아가페란 조건 없는 사랑, 상대의 가치나 보답 여부와 무관하게 베푸는 사랑을 뜻하는 그리스어 개념입니다. 이것이 엘리세이의 에로스(eros)적 신앙, 즉 보상(구원, 신의 임재)을 기대하는 신앙과 대비를 이룹니다. 톨스토이 문학 연구에서 이 대비는 핵심 축으로 자주 다루어집니다(출처: 톨스토이 재단).
두 인물의 대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엘리세이: 규칙과 의식 중심, 목적지(성지) 지향, 형식적 경건함 추구
- 예프렘: 사람 중심, 현재의 필요에 응답, 실존적 자비 실천
- 결과: 성지에 도착한 엘리세이는 허전함을 느끼고, 도착하지 못한 예프렘은 평온함을 얻음
제가 이 구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톨스토이가 엘리세이를 단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엘리세이도 결국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톨스토이의 변증법적 서사 구조, 즉 두 대립항을 충돌시켜 더 높은 진실을 도출하는 방식이 여기서 빛을 발합니다. 어느 한쪽을 완전한 악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독자가 어느 길이 본질에 더 가까운지 스스로 판단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무언가 거창한 목적지를 향해 달리면서 정작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놓치고 있다면, 이 소설이 좋은 질문 하나를 던져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지는 반드시 먼 곳에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형식적인 숭고함을 완성하려는 집착보다 눈앞의 고통에 응답하는 선택이 훨씬 더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이 작품이 단편임에도 묵직하게 읽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한 번쯤 원문을 직접 펼쳐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