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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의 불가역성, 상실 서사, 기억의 왜곡)

by 이초록 Chorock 2026. 7. 5.

이초록의 영미문학적 삶-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손글씨

지나간 것을 다시 붙잡으려다 손만 아팠던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으십니까. 저도 스물다섯, 졸업을 앞두고 그랬습니다. 놓쳐버린 기회들을 머릿속에서 계속 돌려보며 정작 지금 눈앞의 것들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때 줄리언 반스의 마지막 소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를 다시 펼쳤고, 이 책이 그 강박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시간의 불가역성: 줄리언 반스가 46년 만에 꺼낸 고백

일반적으로 노년의 작가가 쓴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면 회고록에 가까운, 다소 무거운 고백 문학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읽어보니 이 책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독자를 흔들었습니다.

1946년 영국 레스터에서 태어난 줄리언 반스는 34살에 데뷔해 46년간 소설을 써온 작가입니다. 이 책은 그의 15번째 장편으로, 스스로 "마지막 책"이라고 선언하며 출간했습니다. 원제는 'Departures', 즉 떠남입니다. 한국어 제목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그 의미를 더 직접적으로 풀어낸 번역입니다.

이 작품은 하이브리드 서사(Hybrid Narrative)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이브리드 서사란 픽션, 논픽션, 회고록이 하나의 텍스트 안에 혼재하는 서술 방식으로, 장르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허무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핵심 전략입니다. 줄리언 반스는 『플로베르의 앵무새』부터 이 방식을 꾸준히 실험해 왔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것이 가장 응축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화자의 이름은 '줄리언'이고, 직업은 작가이며, 옥스퍼드 출신에 혈액암을 앓고 있습니다. 줄리언 반스 자신과 사실상 동일한 조건입니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자전적 픽션(Autofiction)이라는 장르적 긴장을 경험합니다. 자전적 픽션이란 작가 자신의 삶을 소재로 하되, 허구의 형식을 빌려 서술하는 방식으로, 독자로 하여금 "이게 사실인가, 아닌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소설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그중에서 제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구조는 이렇습니다.

  • 1장: 작가에게 떠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 작품에서의 떠남과 죽음으로서의 떠남.
  • 2장: 1964~68년 옥스퍼드 시절, 스티븐과 진이라는 두 친구의 사랑 이야기.
  • 3장: 코로나 시기 혈액암 진단과 투병 과정, 그리고 삶에 대한 재사유.
  • 4장: 40년 후 스티븐의 편지, 그리고 진과의 재회 주선.
  • 5장: 두 사람의 재결합과 파국, 그리고 소설로 쓰겠다는 약속의 파기.

의사가 "관리는 가능하지만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때, 줄리언이 "아, 이것은 삶과 같군"이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짧지만 오래 남습니다. 제가 직접 읽으면서 손을 멈췄던 문장입니다. 이 작가는 죽음 앞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독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걸어옵니다.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형식적 실험이 이 작품의 특징이지만, 그 실험이 독자를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점이 제가 이 책에서 가장 놀랐던 부분입니다.

상실 서사와 기억의 왜곡: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감정이다

스티븐과 진의 이야기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닙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의 서사를 처음에는 그저 젊은 날의 아름다운 실패담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구술 생애사(Oral Life History) 채록 작업을 병행하던 당시, 노년의 기억들을 텍스트로 옮기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서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구술 생애사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직접 말로 서술하는 것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기억이 얼마나 선택적이고 재구성된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스티븐은 "진을 자주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진은 "그를 사랑하지만 너무 어렵다"고 말합니다. 40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다시 만나 결혼에 이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헤어집니다. 이 구조가 시사하는 것은, 우리가 붙잡으려 했던 과거의 감정은 실제로는 그 당시의 '나'가 재구성한 서사였다는 점입니다. 줄리언 반스는 이것을 서사적 기억 왜곡(Narrative Memory Distortion)으로 그려냅니다. 서사적 기억 왜곡이란 기억이 있는 그대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과 필요에 의해 재편집되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기억 연구 분야에서 이 현상은 이미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 있습니다. 기억은 사진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꺼낼 때마다 다시 쓰인다는 것이 현재 인지심리학의 주류 견해입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줄리언 반스는 이 사실을 이론으로 설명하는 대신, 스티븐과 진의 어긋난 기억들을 나란히 배치하는 것으로 독자 스스로 깨닫게 합니다. 제 경험상 이 방식이 훨씬 더 오래 남습니다.

저 역시 당시 독거노인들의 구술 채록 현장에서 비슷한 것을 반복해서 목격했습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그때 내가 떠났다"고 말하는 어르신과 "그때 내가 버려졌다"고 말하는 어르신이 공존했습니다. 사실은 하나인데 기억은 달랐습니다. 그 경험이 있었기에 이 소설에서 스티븐과 진이 엇갈리는 장면이 단순한 서사적 갈등으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소설이 현장 작업의 개념적 틀을 바꿔버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진이 줄리언의 책을 향해 "하이브리드 작업은 실수"라고 직격하는 장면도 흥미롭습니다. 제가 직접 읽으면서 가장 웃었던 장면이기도 한데, 이것은 메타픽션(Metafiction)의 전형적인 기법입니다. 메타픽션이란 소설 안에서 소설 쓰기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 허구의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줄리언 반스는 자신의 작업 방식에 대한 비판을 소설 속에 직접 넣고, 거기에 자신의 방어를 붙입니다. 작가와 독자 사이의 경계를 허물면서 동시에 작품의 형식에 대한 논쟁을 본문 안에서 수행하는 방식입니다.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줄리언 반스는 영미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2011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부커상(Booker Prize)을 수상한 것이 그 권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사례입니다(출처: Man Booker Prize 공식 사이트). 부커상이란 영국 연방 국가의 작가들을 대상으로 수여되는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노벨 문학상과 함께 영어권 문학의 최고 영예로 꼽힙니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계속 구경하고 있어라. 나는 슬쩍 사라지겠다." 46년간 글을 써온 작가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이 문장 앞에서, 저는 한동안 책을 덮지 못했습니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붙잡으려 했을 때 정작 잃는 것이 무엇인지, 이 소설은 직접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줍니다. 과거의 상실에 묶여 있다는 느낌이 드신다면, 이 책이 그 매듭을 푸는 방식이 지금의 당신에게도 유효할 것입니다. 줄리언 반스의 다른 작품들을 아직 읽지 못하셨다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부터 시작하시는 것을 권합니다. 같은 주제를 더 젊은 목소리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ruWC-NiXt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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