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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역주행, 선택, 안진진)

by 이초록 Chorock 2026. 6. 8.

이초록의 영미문학적 삶- 모순 양귀자 손글씨

25살이라는 나이가 '결혼 적령기'라고 불리던 시대의 이야기를 2025년에 읽는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미나에서 양귀자의 소설 [모순]을 처음 펼쳤을 때, 저는 오히려 첫 장부터 손을 놓지 못했습니다. 1998년 출간된 이 소설이 2023년부터 역주행을 시작해 2025년 현재 170쇄를 돌파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역주행 소설이 지금도 울리는 이유

사실 저도 처음엔 고전 텍스트를 분석하는 학문적 과제로만 접근했습니다. 영문학 및 비교문학 전공 과정의 '근대성 이후의 한국 소설과 주체적 내러티브의 형성 구조 연구' 세미나에서 원전 분석 대상으로 이 소설을 만났거든요. 그런데 강의 노트를 채워 나가다가 어느 순간 학술적 분석이 아니라 제 얘기를 읽고 있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모순]의 주인공 안진진은 25세 여성으로, 소설 첫 장에서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라고 외치며 결혼 상대를 찾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진짜 핵심은 남편 찾기가 아닙니다. 안진진이 끊임없이 목격하는 것은 일란성 쌍둥이인 어머니와 이모의 극단적으로 갈라진 인생입니다. 똑같이 태어나 같은 날 결혼식을 올렸는데, 어머니는 빗물 새는 단칸방에서 시장 속옷집을 꾸리고 이모는 청담동 고급 아파트에서 노래 교실을 다닙니다. 이 대비가 안진진의 세계관 전체를 규정합니다.

이 구조를 정신분석학 비평(Psychoanalytic Criticism)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정교합니다. 정신분석학 비평이란 텍스트 속 인물의 무의식적 욕망과 억압 구조를 분석하는 문학 비평 방법론입니다. 안진진이 동경하는 이모의 세계는 라캉(Lacan)의 개념으로 말하면 대타자(The Other)입니다. 대타자란 주체가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투사하는 이상화된 외부 존재를 뜻합니다. 안진진은 어릴 때부터 이모를 '우리 엄마가 됐을 수도 있는 존재'로 인식하며, 그 결핍감을 결혼이라는 선택으로 메우려 합니다.

실제로 소설은 선택의 나비 효과를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란 작은 초기 조건의 차이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결과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개념으로, 이 소설에서는 중매 결혼의 순서 배정이라는 단 하나의 우연이 두 자매의 전 생애를 갈랐습니다. 독자들이 재독(再讀)을 반복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읽을 때마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를 달리 생각하게 됩니다.

출판계 통계를 보면 이 역주행 현상의 규모가 실감됩니다. 2025년 1월 기준 독자 연령 분포를 보면 20대 24%, 30대 23%, 40대 25%, 50대 18%로, 특정 세대가 아니라 전 연령층에서 고르게 읽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대를 초월한 독서 현상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의 보편성에서 비롯됩니다(출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안진진의 선택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오래 멈춰 있었던 부분은 남편 후보 두 명의 대비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안진진의 서술이었습니다. 소설 속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내 어머니는 날마다 쓰러지고 날마다 다시 태어난다." 시장에서 속옷을 팔면서 밤마다 일본어 첫걸음을 외우는 어머니와, 노래 교실에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배우는 이모. 이 두 장면이 나란히 놓일 때, 독자는 풍요와 결핍 중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가를 스스로 묻게 됩니다.

안진진의 남편 후보는 두 명입니다. 각각의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나영규: 생활 계획표대로 움직이는 현실파. 데이트 코스를 전날 예약해두고, 영화부터 드라이브까지 시간표가 정해져 있습니다. 안진진은 나영규에게만 가족의 어두운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 김장우: 야생화를 찍으러 다니는 사진작가. 말로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남도 여행에서 찍어온 사진을 선물로 건네는 낭만파입니다. 안진진은 김장우와 함께하면 "선명해진다"고 느끼지만, 정작 가족 이야기는 숨깁니다.

이 구조는 문학비평에서 말하는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으로 읽힙니다. 이항대립이란 두 대립항을 통해 주제를 부각시키는 서사 전략으로, 구조주의 비평의 핵심 분석 도구입니다. 양귀자는 이 두 남성을 단순히 '좋은 남자 vs 나쁜 남자'로 배치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낭만, 안정과 불확실성 사이에서 독자 스스로 안진진의 선택을 판단하게 만듭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의 소설은 결말을 알고 나서 다시 읽을 때 완전히 다른 텍스트가 됩니다. 저도 세미나 발표를 준비하며 두 번 읽었는데, 처음 읽을 때 놓쳤던 복선들이 두 번째에 전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안진진이 이모를 "엄마"라고 불리도록 내버려두는 장면, 술에 취해 김장우에게 "감옥"이라고 내뱉는 장면 모두 아버지의 그림자가 안진진 안에 살고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리얼리즘 소설(Realism Novel)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소설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리얼리즘 소설이란 허구적 상상력보다 실제 사회 현실을 정밀하게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소설 양식입니다. [모순]은 1998년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안진진이 고민하는 내용은 지금 20~30대가 SNS에 올리는 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삶의 조건을 갖춘 사람을 만나야 하는가, 내 감정과 현실적 계산 사이에서 어떤 쪽을 택해야 하는가. 세대가 달라도 질문의 형태는 같습니다.

한국문학번역원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한국 소설 중 2020년대에도 꾸준히 재출간되는 작품은 전체의 10% 미만에 불과합니다. [모순]이 그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은 이 소설의 텍스트적 내구성을 객관적으로 증명합니다(출처: 한국문학번역원).

당시 저는 대학원 진학과 취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시기였습니다. 제 경험상 선택의 기로에 설 때 이 소설을 읽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안진진도 틀렸고, 어머니도 이모도 완전히 옳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각자의 방식으로 버텼습니다. 그게 위로가 됐습니다.

결말을 직접 밝히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안진진이 최종적으로 무엇을 선택했는지는 읽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느껴집니다. 20대에 읽을 때, 결혼 후에 읽을 때, 또 중년에 읽을 때 이 소설은 매번 다른 책이 될 것입니다. 역주행의 이유도, 재독자가 많은 이유도 결국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쯤 안진진의 선택 앞에서 스스로를 대입해 보시기 바랍니다. 생각보다 오래 그 자리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GYfY13bSQ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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