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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실존적 소외, 소유 모드, 타자화)

by 이초록 Chorock 2026. 5. 13.

이초록의 영미문학적 삶- 변신 카프카 손글씨

솔직히 말하면, 저는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벌레가 됐다'는 설정보다 그 다음 문장에서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레고르 잠자가 자신의 몸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확인한 직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아침 미팅 걱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비교문학 세미나에서 처음 이 장면을 마주했을 때, 저는 그게 그레고르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직감했습니다.

벌레가 된 후 가장 먼저 회사 걱정을 한 남자의 실존적 소외

그레고르는 왜 벌레가 됐을까요. 아니, 더 정확히는 이렇게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벌레가 되기 전부터 이미 벌레처럼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카프카가 이 작품에서 쓴 독일어 표현 'Ungeziefer'는 일상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단어입니다. 우리말로 따지면 '독충' 또는 '갑충' 정도의 뉘앙스인데, 카프카의 아버지가 실제로 카프카의 지인에게 썼던 표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핵심 소재 자체가 처음부터 카프카 자신의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셈입니다.

제가 학기 말 비평 과제를 준비하면서 'Kafkaesque(카프카에스크)'라는 개념을 처음 제대로 공부했을 때, 이 단어가 단순히 '초현실적이고 불합리한 상황'을 뜻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여기서 카프카에스크란 관료제적 폭력, 즉 시스템이 개인을 이유 없이 압박하고 그 안에서 개인이 무력하게 소비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레고르의 삶이 정확히 그랬습니다. 5년간 단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일했고,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건강을 모두 갈아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 번 제 기능을 못 하자 가족도 회사도 그를 더 이상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습니다.

영미 모더니즘 문학에서 말하는 '파편화된 자아(Fragmented Self)'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파편화된 자아란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인간의 정체성을 조각조각 분열시켜 통합된 주체성을 잃게 만드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T.S. 엘리엇이나 제임스 조이스가 문학적으로 탐구했던 이 주제를 카프카는 훨씬 더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몸 자체를 벌레로 만들어버리는 방식으로 형상화했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카프카가 단순한 실존주의 작가가 아니라 신체 서사의 선구자이기도 했다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동기들과 카페에서 이 장면을 분석하다가 한 친구가 던진 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우리도 언제든 벌레가 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때는 그냥 지나쳤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게 이 소설의 핵심을 꿰뚫는 질문이었습니다.

가족의 눈물이 왜 소름 끼치는가, 소유 모드와 타자화의 민낯

소설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은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하는 순간이 아닙니다. 저는 그레고르가 죽은 다음 날 가족 세 명이 함께 교외로 소풍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이 훨씬 더 서늘하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이 잔인한 일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삶의 방식을 '소유(Having) 모드'와 '존재(Being) 모드'로 구분했습니다. 소유 모드란 타인을 그 사람의 기능과 효용으로만 판단하는 방식, 쉽게 말해 '잘 돌아가면 사랑하고 망가지면 버리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레고르 가족이 보여주는 반응이 정확히 이렇습니다. 그들은 그레고르가 돈을 벌어올 때는 애정을 표현했지만, 그가 기능을 잃자 혐오와 부담감을 꾹꾹 눌러가며 마지못해 돌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하나 더 등장합니다. 바로 타자화(Othering)입니다. 타자화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자신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규정하여 도덕적 배려의 범위에서 배제하는 심리 기제를 뜻합니다. 여동생이 "저건 오빠가 아니에요, 괴물이에요"라고 외치는 장면이 이 타자화의 완성입니다. 그 말 한 마디로 여동생은 그레고르를 가족이라는 범주 바깥으로 완전히 밀어냅니다.

더 흥미로운 건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읽히는 가족들의 무의식입니다. 정신분석(Psychoanalysis)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불일치할 때 행동에 미묘한 오류가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여동생이 "내 특권"처럼 돌봄을 독점하다가 어머니가 청소를 하자 갑자기 폭발한 장면, 아버지가 사과를 집어 던진 장면, 하숙객이 떠난 뒤 참았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장면 — 이 모든 것이 억눌린 혐오가 터져 나오는 순간들입니다. 제가 이 장면들을 처음 읽었을 때, 이게 카프카의 픽션이 아니라 어디선가 실제로 있을 법한 풍경이라는 생각에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이 소설이 출판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유효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레고르 가족이 보여주는 소유 모드의 오류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반복됩니다.

  • 인간을 기능으로만 평가하고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한다
  • 기능이 멈추는 순간 혐오가 무의식에 자리 잡기 시작한다
  • 핑곗거리가 생기면 그 혐오를 정당화하며 관계를 청산한다
  • 청산 이후에도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를 도덕적이라 믿는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이 구조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압축 성장의 속도 안에서 인간관계가 성과와 효용 중심으로 재편된 사회일수록, 그레고르 가족이 보여주는 소유 모드의 논리가 낯설지 않게 느껴집니다. 저도 취업 준비를 하면서 비슷한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카프카 문학 연구에서도 이 작품은 단순한 초현실 소설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소외와 실존 위기를 다룬 사회비판 문학으로 분류됩니다(출처: 독일문학 아카이브 마르바흐).

결국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그레고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정작 카프카가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은 벌레가 된 사람이 아니라, 그 벌레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얼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얼굴이 낯설지 않다면, 이 소설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겁니다. 변신을 읽고 나서 주변 사람들을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한 번쯤 되짚어보시길 권합니다. 저도 그 질문 앞에서 아직 편하지 않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eyShrIc4-_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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