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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도덕적 각성, 계급 구조, 실존적 구원)

by 이초록 Chorock 2026. 6. 5.

이초록의 영미문학적 삶- 부활 톨스토이 손글씨

누군가 당신에게 "지금 살고 있는 방식이 정말 당신의 선택입니까?"라고 물어온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영문학·비교문학 전공 시절, 이 질문을 톨스토이의 소설 한 권이 먼저 던졌습니다. 당시 저는 제도권 학문의 평가 시스템 안에서 주어진 기준대로 공부하며 그것이 옳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부활을 원전으로 읽으면서, 그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도덕적 각성, 한 귀족의 뒤늦은 자각

톨스토이의 부활은 단순한 연애 소설이 아닙니다. 귀족 청년 네흘류도프가 과거에 자신이 망가뜨린 여인 마슬로바를 법정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고, 그 죄책감이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수업에서 처음 접할 때, 솔직히 말해 네흘류도프의 변화가 과연 진심인가를 의심했습니다. 부유한 귀족이 마음 한 번 먹는다고 진짜 달라질 수 있느냐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텍스트를 깊이 읽을수록, 그 변화가 자기 위안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데서 묘한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심리분석 비평에서 말하는 회심(回心) 서사, 즉 타락한 주체가 외부 충격을 계기로 자아를 재구성하는 서사 구조가 이 소설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회심 서사란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됐다"는 변화가 아니라, 기존의 자아 전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를 만난 직후부터,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던 약혼자의 집안, 귀족 사교계, 토지 상속이라는 현실 전부를 낯선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이 도덕적 각성이 얼마나 낯설고 불편한 과정인지를 저도 작게나마 경험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과의 커리큘럼은 세련된 모더니즘 텍스트 분석 위주였고, 거시 서사나 도덕 문학을 꺼내면 어딘가 낡은 것을 하는 사람처럼 취급받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 분위기가 하나의 대타자(Other)로서 작동하고 있었던 셈인데, 여기서 대타자란 라캉의 정신분석학 개념으로 개인이 의식하지 못한 채 따르는 사회적 규범이나 권위를 가리킵니다. 부활을 읽으며 저는 처음으로 그 대타자를 의식적으로 의심해 봤습니다.

네흘류도프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 이 행위는 진정 양심의 소리인가, 아니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인가 하는 갈등은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저는 이 부분이 톨스토이 소설이 도스토옙스키 소설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이 극단 사이를 격렬하게 진동한다면,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훨씬 느리고 일상적인 리듬으로 자신의 위선을 걷어냅니다. 그 과정이 오히려 더 불편하게 공감됩니다.

계급 구조, 법정과 시베리아가 보여준 민낯

마슬로바라는 인물을 이해하려면, 그녀가 어떻게 그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를 먼저 봐야 합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종살이 여성이었고, 원치 않는 아이를 다섯이나 잃었습니다. 마슬로바는 여섯 번째로 태어나 지주 여인에게 반쯤은 양녀로, 반쯤은 하녀로 자랐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계급 구조의 경계 위에 선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수업에서 이 장면들을 분석하며,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의 개념 중 하나인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괴리를 실감했습니다. 기표란 눈에 보이는 언어적 표면, 기의란 그것이 가리키는 실제 의미를 뜻합니다. 법정에서 마슬로바에게 씌워진 살인범이라는 기표는, 그 기의가 전혀 다른 이야기, 즉 18살에 배신당하고 사회가 밀어낸 여성의 역사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괴리가 120년 전 러시아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강의 노트를 한동안 덮지 못했습니다.

네흘류도프가 마슬로바를 따라 시베리아 유형길에 동행하면서 만나는 인물들을 보면, 톨스토이가 이 소설에서 고발하려 한 것이 훨씬 넓은 범위임을 알게 됩니다. 죄수들의 면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술을 밀매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시골 여성
  • 정교(正敎)를 침해했다는 혐의로 유배된 분리파 신도
  • 필요한 정보를 캐내다 투옥된 청년 리즈야
  • 반정치 활동을 했다고 잡혀 온 혁명 그룹의 리더

이들의 공통점은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데 불편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재판소가 정의의 기관이 아니라 지주 계급 이익을 보호하는 행정 도구임을 소설은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19세기 러시아의 사회 구조를 연구한 문헌들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당시 러시아 농노 해방령(1861년) 이후에도 소작농의 실질적인 경제 조건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으며, 토지를 가진 귀족 계층과 무토지 농민 사이의 격차는 1890년대에도 여전히 구조적으로 고착되어 있었습니다(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톨스토이가 소설 속에서 네흘류도프로 하여금 자신의 영지를 소작농들에게 무상 분배하게 만든 것은 단순한 선행 묘사가 아니라, 당대의 토지 불평등 구조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가진 자의 각성이 구조를 바꾸는 데 실제로 얼마나 효과적인가를 놓고 오래 생각했습니다. 네흘류도프의 변화에 감동받으면서도, 그가 돈과 인맥이 있었기 때문에 죄수들을 도울 수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 한켠에 걸렸습니다. 그가 평범한 시민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실존적 구원, 부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소설의 제목인 부활은 기독교적 의미의 부활과 직결됩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신학적 부활 개념을 사회적 실천과 연결 짓습니다. 네흘류도프가 마지막에 영국인에게 받은 복음서를 펼치고 마태복음을 오래 읽는 장면은, 그의 변화가 단순한 감정적 회한이 아니라 종교적 윤리학에 기반한 실존적 결단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실존적 결단이란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개념으로, 외부의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과 의지만으로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네흘류도프가 마슬로바의 청혼 거부를 받아들이고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며 작별하는 장면은 이 개념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자신의 죄책감 해소가 아닌, 타인의 삶을 온전히 존중하는 것으로 부활이 완성됩니다.

마슬로바의 변화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그녀는 시베리아 유형길에서 만난 마리아 파블로브나라는 인물에게 깊은 영향을 받습니다. 마리아는 귀족 장군의 딸이면서도 자발적으로 특권을 버리고 혁명에 투신한 여성입니다. 제가 이 인물을 처음 읽었을 때, 솔직히 이건 좀 이상적으로 그려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실천한 것들, 집에서 보내온 물건을 다른 죄수들에게 나눠주고 돌봄 노동을 자처하는 행위들은 당시 러시아 혁명적 나로드니키(Narodniki) 운동의 실제 역사와 맞닿아 있습니다. 나로드니키란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귀족 출신 지식인들이 농민 속으로 들어가 민중 운동을 이끈 사회 운동을 가리킵니다(출처: 스탠퍼드 철학백과).

마슬로바가 네흘류도프의 청혼 대신 시몬손을 선택하는 결말도 오래 생각하게 합니다. 일부에서는 이를 서사적으로 아쉬운 결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이 선택이 마슬로바의 진정한 부활을 완성한다고 봅니다. 그녀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받는 대상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의 현재를 기준으로 능동적으로 삶을 선택하는 주체가 됩니다.

소설을 덮고 나서 드는 의문은 결국 하나로 모입니다. 네흘류도프가 도시로 돌아간 뒤에도 그 부활을 지속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질문은 소설 속 그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120년이 넘도록 부활이 계속 읽히는 이유는 아마 이 물음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은 뒤 인문학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다시 생각했고, 그것이 제 공부의 방향을 조금이나마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각성은 이벤트가 아니라 매일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는 톨스토이의 메시지, 한 번쯤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gTu3xsabn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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