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문학 수업 시간에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처음 제대로 읽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1973년에 발표된 소설이 어쩜 이렇게 지금 제 이야기 같을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성과 경쟁에 지쳐 마음 둘 곳을 잃었던 그 시기에, 눈 덮인 길 위의 세 부랑자가 저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유랑 — 경제적 가난이 아닌 뿌리 뽑힌 존재들의 이야기
제가 수강했던 '근대화 시기의 리얼리즘 문학과 소외 계층 서사 연구' 수업에서 이 작품을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와 나란히 놓고 비교 비평하는 과제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교수님이 던진 질문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 인물들은 가난한가, 아니면 유랑하는가?" 처음엔 당연히 둘 다라고 생각했는데, 텍스트를 파고들수록 답이 달라졌습니다.
영달은 공사판 일거리가 끊겨 떠나는 게 아닙니다. 정확히는 천 씨 부인과의 불륜이 발각되어 도망치는 중이고, 정 씨는 10년 만에 고향 삼포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백화는 열여덟 살에 직업소개소에서 술집으로 팔린 뒤 빚을 지고 탈출한 상태예요. 세 사람 모두 경제적 결핍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실주의 문학(Realism)이란 현실을 이상화하거나 낭만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문학 양식을 뜻합니다. 황석영은 이 사실주의적 필치를 통해 인물들의 결핍을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결핍을 날것으로 드러내면서, 독자가 인물들과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맞추게 만듭니다.
[삼포 가는 길]을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작품의 핵심은 계층보다 실존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영달과 정 씨의 나이는 30대, 백화는 스물두 살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뜨거워야 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 뜨거움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소진되고 있습니다. 이게 1973년 이야기인데도 지금 읽으면 어디서 많이 본 풍경처럼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한국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이 작품이 산업화 시대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보편적 실존 서사인지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후자 쪽에 더 기울어져 있습니다.
연대 — 폐가의 불빛이 말해주는 것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장면은 세 사람이 폐가에 들러 불을 피우는 대목입니다. 영달이 다리를 삔 백화를 업고, 불을 피워 발을 녹여주는 장면. 거창한 대사도 없고 감동적인 독백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합니다.
이걸 공간 비평(Space Criticism)의 시각으로 읽으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공간 비평이란 문학 작품 속 공간이 인물의 심리와 사회적 맥락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분석하는 비평 방법론입니다. 이 관점에서 폐가는 단순한 피난처가 아닙니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버려진 공간, 즉 아무도 소유하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소유되지 않은 사람들이 잠시 숨을 고르는 장면입니다. 그 폐가에서의 온기가 작품 전체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연대의 순간으로 기능합니다.
세 사람의 관계가 흥미로운 건 동질감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백화가 영달에게 "내 배 위로 남자들 사단 병력이 지나갔어"라고 쏘아붙이는 장면에서 영달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 이게 저는 연대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지만 측은히 여기지 않는 태도. 그러면서도 정 씨가 기차역에서 자기 돈을 털어 표와 빵과 달걀을 백화에게 건네는 것. 이 투박한 나눔이 사실주의 서사에서 얼마나 묵직하게 다가오는지, 직접 읽어보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사회학적 비평(Sociological Criticism)으로 보면 이 연대는 더 선명해집니다. 사회학적 비평이란 문학 텍스트를 사회 구조, 계층, 이념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방법론입니다. 세 사람은 각자 다른 이유로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난 인물들입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같은 위치에서 나오는 공명입니다. 국내 한국문학 연구에서도 이 작품의 연대 서사가 70년대 민중 문학의 대표적 성취로 꼽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출처: 한국문학번역원).
세 인물이 보여주는 연대의 방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영달: 신고 대신 동행을 선택하며 백화를 묵묵히 보살핍니다.
- 정 씨: 가진 것이 없어도 마지막 돈을 나눠주며 백화의 앞길을 배웁합니다.
- 백화: 자신의 진짜 이름 '이정내'를 두 사람에게만 말해줌으로써 마음을 엽니다.
홈리스네스 — 삼포는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수업에서 이 소설의 결말을 처음 분석했을 때 저는 꽤 오래 멍했습니다. 정 씨가 10년 만에 돌아가는 고향 삼포. 그런데 기차 안에서 만난 노인이 말합니다. 삼포에 지금 공사판이 들어섰고, 육지와 이어지는 길이 새로 났으며, 관광 호텔이 10개 넘게 세워진다고요. 정 씨의 얼굴이 멍해집니다.
여기서 홈리스네스(Homelessness)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홈리스네스란 단순히 집이 없다는 물리적 상태가 아니라, 돌아갈 심리적·정서적 근거지를 잃어버린 실존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황석영은 이 단어를 쓰지 않지만, 정 씨가 삼포 소식을 듣는 순간 그 개념을 온전히 구현해냅니다. 고향마저 자본화된 공간이 되어버렸을 때, 인간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 결말을 두고 허무주의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읽습니다. 소설은 희망을 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절망을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어두운 들판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 그 안에 앉은 영달과 정 씨. 황석영이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동행입니다.
기표(Signifier)라는 기호학 개념으로 접근하면 이 구조가 더 분명해집니다. 기표란 의미를 담는 언어적·문화적 형식으로, 소쉬르 기호학에서 기의(의미 내용)와 짝을 이루는 개념입니다. 작품 속 공사판, 관광 호텔, 기찻길은 모두 근대화가 공동체적 유대를 해체하고 교환 가치만 남긴 자본주의의 기표로 읽힙니다. 반면 폐가의 불, 백화에게 건넨 달걀, 진짜 이름의 공유는 그에 맞서는 인간 본연의 기표입니다.
이 작품이 1970년대 한국 산업화 시기의 맥락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당시 급격한 경제 성장이 농촌 공동체를 해체하고 이농 노동자를 대거 양산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입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1960~1980년대 한국의 도시화율은 28%에서 57%로 급등하며, 수백만 명이 고향과 단절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출처: 국가기록원). 황석영은 그 숫자 속의 얼굴 세 개를 꺼내 보여준 것입니다.
[삼포 가는 길]은 읽고 나서 한참 마음 한쪽이 서늘한 소설입니다. 화려한 결말도, 교훈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생각납니다. 삼포가 없는 사람들, 돌아갈 곳을 잃은 채 오늘도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이 소설이 불편하다면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그 불편함이 정확히 이 작품이 노리는 지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