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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의 쓸모 (이유의 유형, 사회적 관계, 인과론)

by 이초록 Chorock 2026. 6. 23.

이초록의 영미문학적 삶- 왜의 쓸모 비 마이 비 손글씨

이유를 잘 대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저는 세미나 발제를 준비하면서 이 전제가 절반은 틀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건 '정확한 이유'가 아니라 '상황에 맞는 이유'라는 것, 사회학자 찰스 틸리의 저서 왜의 쓸모가 이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이유의 유형: 우리가 쓰는 말에는 구조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유를 대는 행위는 논리적이고 정확할수록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꽤 다릅니다. 스물다섯 살에 영문학과 비교문학 연계 세미나에서 이 책을 텍스트로 다루면서, 저는 오히려 정확한 이유가 대화를 망치는 순간을 수도 없이 목격했고 직접 겪기도 했습니다.

찰스 틸리는 인간이 이유를 대는 방식을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관습(convention), 이야기(story), 코드(code), 학술적 논고(technical account)가 그것입니다. 이 분류 기준은 두 가지 축인데, 하나는 보편성과 구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공식 의존도와 인과론적 설명 비중입니다.

여기서 인과론(causation)이란 어떤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 원인과 결과의 연결 고리를 통해 설명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왜냐하면"으로 이어지는 논리 구조가 바로 이것입니다.

네 가지 유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관습: 보편적이고 공식에 의거한 설명. "제가 좀 덤벙대서요"처럼 상황에 맞게 통용되는 말
  • 이야기: 보편적이지만 인과론적 설명을 포함. 예외적인 사건을 일상으로 편입시키는 서사
  • 코드: 구체적이고 규칙에 의거한 설명. 법원 판결이나 의사 진단처럼 특정 규정을 근거로 삼는 것
  • 학술적 논고: 구체적이고 인과론적인 설명. 전문 지식과 명확한 근거를 동원하는 방식

제가 직접 발제문을 쓰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관습에 관한 대목이었습니다. 동료의 신문에 커피를 쏟았을 때 마찰 계수를 들먹이며 설명하거나 아침에 가족과 싸운 이야기를 꺼내면 상대방이 당혹감을 느낀다는 것, 그게 왜 그런지 사회학적으로 짚어주는 부분에서 저는 손을 멈추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이유의 정확성보다 관계적 맥락이 우선한다는 주장은 인문학도인 저에게도 꽤 낯선 시각이었습니다.

목적론적 서사 구조(teleological narrative structure)라는 개념도 여기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여기서 목적론적 서사란 모든 사건을 어떤 목적이나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흐름으로 해석하는 서사 방식입니다. 찰스 틸리가 이야기를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사회적 발명품"이라고 부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혼란 속에서 살다가, 바깥으로 나와서야 비로소 그 혼란을 이야기로 정리합니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말했듯, 이야기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이야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회적 관계와 인과론: 누가 말하느냐가 내용보다 중요하다

이 책에서 제가 가장 오래 곱씹은 부분은 이유 대기의 방식이 관계의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유를 어떻게 대야 하는지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왜 우리가 관계에 따라 다르게 말하는지를 파헤치는 책이었습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가벼운 피해를 입혔을 때와 그 반대 상황을 비교해 보면 이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전자의 경우 이유 설명은 최소화되거나 생략되기도 하지만, 후자라면 이유에 더해 사과와 인정이 필수적으로 따라붙습니다. 상하 관계(hierarchical relationship), 즉 두 사람 사이의 사회적 위계가 말의 내용보다 말의 형식을 먼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거리감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의 중 잠깐 멈칫한 상황을 청중에게 설명할 때는 "잠깐 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목격한 친한 친구가 나중에 물어본다면, 그 멈칫함이 구체적으로 어떤 표정 하나에서 비롯됐는지까지 풀어내야 납득이 됩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많은 인과론적 설명을 요구받는다는 역설이 흥미롭습니다.

제 경험상 이 구조는 학문적 맥락에서도 정확하게 작동합니다. 당시 세미나에서 교수님과 대화할 때와 동기들과 조별 토론을 할 때 저는 분명히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상황에 맞게 했던 것인데,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제가 이미 코드와 이야기를 전환하며 쓰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찰스 틸리는 사회적 영향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이 네 가지 유형을 적재적소에 구사한다고 말합니다. 의사가 환자와 날씨 이야기를 할 때는 관습을 쓰고, 치료 계획을 설명할 때는 이야기를 쓰고, 동료 의사와 증상을 논할 때는 학술적 논고를 씁니다. 택시 기사도 야간 할증을 설명할 때는 코드를 대고, 우회한 이유를 설명할 때는 학술적 논거를 동원합니다.

사회적 상호 작용(social interaction) 연구에서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이 개인이 상황에 따라 다른 자아를 연기한다고 주장한 것과 맥락이 닿아 있습니다. 여기서 사회적 상호 작용이란 두 사람 이상이 서로의 행동에 반응하며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찰스 틸리는 바로 그 과정에서 이유 대기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해 낸 셈입니다. 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도 언어가 정보 전달보다 관계 유지 기능을 더 자주 수행한다는 사실은 이미 반복적으로 확인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언론학회).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Guns, Germs, and Steel)가 양질의 이야기(superior story)의 사례로 언급되는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가 됩니다. 학술적 논고의 내용을 이야기의 언어로 번역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 그 번역의 질이 책의 설득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찰스 틸리 스스로도 이 책이 그런 시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왜의 쓸모 자체가 자기 참조적(self-referential) 텍스트인 셈입니다.

한편,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독서 효과에 관한 연구에서도 자기 서사 구성 능력이 심리적 회복 탄력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결과가 나온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스물다섯의 번아웃 속에서 이 책을 읽으며 방황을 이야기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 단순한 기분 변화가 아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책에서 다소 밀도가 높아 읽기 까다로운 1장을 먼저 만나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2장부터 읽고 사례에 익숙해진 뒤 다시 1장으로 돌아가는 방식을 권합니다. 이유 대기의 구조가 몸에 먼저 와닿고 나면, 개념 정리는 훨씬 수월하게 들어옵니다.

이유를 잘 대고 싶다면 논리를 갈고닦기 전에 상대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의 구조를 먼저 파악하는 게 순서입니다. 왜의 쓸모가 알려주는 건 결국 그것입니다. 대화가 어색하거나 관계가 어긋난다고 느낀다면,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의 유형이 상황과 맞지 않았던 건 아닌지 돌아볼 계기로 이 책을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CnV5idNauf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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