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미어문학을 4년 동안 공부하면서 같은 책을 여러 번 다시 읽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읽었을 때는 개츠비의 순애보적 사랑에 가슴이 뭉클했는데, 졸업을 앞둔 지금 다시 펼치니 전혀 다른 책처럼 느껴졌습니다. 같은 텍스트가 읽는 시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진다는 것, 여러분도 경험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재즈 시대라는 배경, 그리고 피츠제럴드의 삶
[위대한 개츠비]가 1925년 4월에 처음 출판됐을 때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오히려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에게 배포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군복을 입은 채 전쟁터에서 이 소설을 읽었던 청년들이, 군 복무 경험이 있는 개츠비에게서 깊은 공감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인 1920년대 미국은 흔히 재즈 에이지(Jazz Age)라고 불립니다. 여기서 재즈 에이지란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 경제가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사치와 향락, 물질 만능주의가 사회 전반을 뒤덮었던 시기를 가리킵니다. 금주법(Prohibition)이 시행 중이었음에도 지하 바(Speakeasy)에서는 술이 넘쳐흘렀고, 도발적인 패션과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기성 규범에 저항했던 여성들을 가리키는 플래퍼(Flapper)가 등장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삶을 들여다보면 소설이 훨씬 입체적으로 읽힙니다. 제가 처음 피츠제럴드의 전기를 접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이 작가 본인의 삶을 이토록 촘촘하게 반영하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시카고 금융업자의 딸이었던 첫사랑 지네브라 킹은 데이지 뷰캐넌의 실질적 모델로 꼽히고, 그녀와 결혼한 부유한 사업가 윌리엄 미첼은 톰 뷰캐넌의 모델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차였던 피츠제럴드의 상처가 개츠비의 집착으로 승화된 셈입니다.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시대적 키워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재즈 에이지(Jazz Age): 1920년대 미국의 물질적 풍요와 도덕적 방종이 공존하던 시대
- 금주법(Prohibition): 1920~1933년 시행, 역설적으로 지하 경제와 조직 범죄를 키운 법
- 플래퍼(Flapper): 기성 여성상에 저항한 자유로운 신여성
-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 노력만으로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미국 건국 이념
닉 캐러웨이라는 서술자,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위대한 개츠비]를 두고 많은 독자들이 개츠비의 비극에 주목합니다만, 저는 읽을수록 서술자인 닉 캐러웨이가 더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닉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소설 서사학에서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신뢰할 수 없는 화자란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달하지만, 그 서술 자체가 편향되거나 왜곡되어 있어 독자가 행간을 읽어야 하는 서술 방식을 가리킵니다. 닉은 소설 첫 페이지에서 스스로를 "내가 아는 한 가장 정직한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텍스트를 분석해보니, 닉은 개츠비의 불법 행위를 눈감고 데이지와 톰의 타락을 방관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도덕적 관찰자로 포장합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을 문학 비평에서는 프레임 서사(Frame Narrativ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프레임 서사란 하나의 이야기가 또 다른 이야기를 감싸는 구조로, 내부 이야기의 의미가 외부 서술자에 의해 굴절되는 효과를 냅니다. 피츠제럴드는 이 장치를 통해 독자가 개츠비를 낭만적 영웅으로 오해하도록 유도하면서, 동시에 그 오해 자체가 허상임을 폭로합니다. 닉의 서술을 그대로 믿으면 개츠비는 순수한 사랑의 화신이지만, 닉의 시선 자체를 의심하면 개츠비는 과거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편집적 인물로 읽힙니다. 저는 후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말미에 닉이 데이지와 톰을 두고 "그들은 경솔한 사람들이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문장이 묘하게 오래 남는 이유는 정작 닉 자신도 그 경솔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방관자도 결국 공모자라는 것, 영문학 강의실에서 이 대목을 두고 토론했을 때 제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메리칸 드림의 균열,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
개츠비가 위대한가, 위대하지 않은가. 이 질문이 100년 가까이 독자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신화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소설 속에는 개츠비의 아버지가 닉에게 건네주는 낡은 책 한 권이 등장합니다. 그 책 여백에는 개츠비가 어릴 적 직접 적어둔 하루 생활 계획표가 있습니다. 기상 시간, 운동 시간, 공부 시간을 촘촘히 채운 이 계획표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에 등장하는 13가지 덕목 및 시간 관리 원칙과 구조가 거의 동일합니다. 여기서 피츠제럴드의 의도가 드러납니다. 개츠비는 처음부터 자수성가(Self-Made Man)의 신화를 믿고 그것을 실천하려 했던 청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수성가란 타고난 환경에 상관없이 개인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 서사입니다.
그러나 개츠비의 결말은 그 신화가 1920년대에 이미 작동을 멈췄음을 보여줍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 가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는 피츠제럴드가 이 소설에서 가장 공들여 쓴 문장으로 평가받습니다. 저도 이 문장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습니다. 희망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허무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취업준비생으로서 강의실 바깥의 현실을 마주하는 요즘, 저는 개츠비의 초록색 불빛이 남 얘기가 아니라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이는 목표가 실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감각, 성취만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잊어버리는 감각. 이런 점에서 [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아메리칸 드림의 달성 가능성에 대한 회의론은 학문적으로도 뒷받침됩니다. 경제적 이동성(Economic Mobility), 즉 태어난 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측정하는 지표에서 미국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출처: 하버드 경제학과 기회 균등 프로젝트). 부모의 소득이 자녀의 소득을 강하게 예측한다는 이 연구 결과는 개츠비가 실패한 이유가 그의 의지 부족이 아니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고교 및 대학 교육과정에서 수십 년째 필독서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그 문학적·사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출처: 미국교육부).
개츠비가 위대한지 아닌지는, 아마 읽는 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질문일 것입니다. 학부 초년생이었던 저는 그를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개츠비는 위대하지 않았지만, 그가 믿었던 꿈만큼은 진짜였다고. 그 꿈이 사회라는 구조 안에서 어떻게 부서지는지를 이 소설만큼 정확하게 그린 작품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본인이 어떤 시선으로 개츠비를 읽게 되는지 한번 확인해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