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체셔 고양이, 모자 장수, 하트 여왕)

by 이초록 Chorock 2026. 7. 2.

스물다섯 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면서 저 자신이 오히려 더 많이 읽힌 적이 있습니다. 독서 치료(Bibliotherapy) 보조 강사로 지역 아동 센터에 나가던 시절, 메인 교재로 꺼내 든 책이 바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다시 읽은 그 책은 생각보다 훨씬 거칠고 날카롭게 저를 건드렸습니다.

체셔 고양이 — 실체 없이도 남는 것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고양이가 사라지면서 마지막에 미소만 남아 있다는 장면을 수업 자료로 정리하다가 손이 멈췄습니다. 그때 막 졸업을 앞두고 있던 저는, 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거든요. 그 미소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습니다.

철학적으로 이 장면은 속성과 실체의 분리 문제를 건드립니다. 여기서 속성이란 어떤 존재가 가진 특성이나 흔적, 쉽게 말해 그 존재가 남기는 인상이나 감각을 의미합니다. 밤하늘의 별빛처럼 실체는 이미 사라졌지만 그 빛이 수만 년을 건너 우리 눈에 닿는 경우, 혹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끓여주신 된장찌개 맛이 어느 식당에서 갑자기 되살아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서는 시각이 갈립니다. 단순한 넌센스 유머로 읽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루이스 캐럴이 논리학자이자 수학자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게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존재론적 질문을 동화의 외피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 이 장면을 소개했을 때, 한 아이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할머니 냄새가 아직도 나요"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어떤 철학 교수의 강의에서도 받지 못한 울림이었습니다.

모자 장수 — 언어의 자의성과 멈춘 시간

제가 직접 수업에서 써봤는데, 모자 장수 파트는 아이들에게 설명하기가 가장 까다로웠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은 오히려 제일 빨리 이해했습니다. 어른인 저만 헷갈렸습니다.

모자 장수가 던지는 말장난의 핵심은 언어의 자의성(arbitrariness of language)에 있습니다. 여기서 언어의 자의성이란 어떤 단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 고리가 없다는 개념으로,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가 정식화한 기호학(semiotics)의 핵심 원리입니다. 기호학이란 언어와 기호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내 뜻은 내가 말하는 그대로예요"라고 하는 앨리스와 "내가 먹는 것을 본다"와 "내가 보는 것을 먹는다"는 다르다고 응수하는 모자 장수의 대화는, 언어가 맥락과 사회적 합의 위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유머로 증명하는 장면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설정은 모자 장수의 시간입니다. 여왕이 "시간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그를 영원한 오후 6시에 가둬버립니다.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어야 하는 존재. 그게 벌이라는 설정이 꽤 섬뜩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장면을 단순한 코미디로 읽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루이스 캐럴이 시간의 순환적 압박에 대한 불안을 여기에 담았다고 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우리가 버티는 이유는 "내일은 조금 다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니까요. 그 기대가 없다면 어떨지, 이 책은 꽤 직접적으로 묻습니다.

독서 치료 현장에서의 활용을 참고하자면, 독서 치료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 인물의 감정과 행동을 아이 자신의 경험과 연결짓는 동일시(identification) 단계
  • 이야기 속 상황이 자신의 상황과 다르게 전개됨을 인식하는 정화(catharsis) 단계
  • 새로운 시각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다시 해석하는 통찰(insight) 단계

이 세 단계는 독서 치료의 표준 모델로, 미국독서치료학회(Association for Poetry Therapy)가 제시한 임상 적용 프레임입니다(출처: Association for Poetry Therapy).

하트 여왕 — 공포로 통치하는 종이 한 장

제 경험상 이 캐릭터가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수업을 준비하면서 하트 여왕을 분석할 때, 저는 이상하게 그 여왕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 시장이라는 이름의 왕국이 요구하던 공포의 언어가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트 여왕은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하면 "저놈의 목을 쳐라!"를 외칩니다. 나중에는 목을 칠 사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지경입니다. 공포 정치(reign of terror)의 전형적 구조입니다. 공포 정치란 구성원을 자발적 동의가 아닌 죽음의 위협으로 통치하는 방식으로, 역사적으로 권위주의 체제가 택하는 지배 논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루이스 캐럴이 이 장면에 심어놓은 핵심은 따로 있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여왕이 결국 트럼프 카드 한 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읽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굳이 그렇게 무겁게 읽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의 실체가 알고 보면 종이처럼 얇을 수 있다는 감각,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묵직한 메시지입니다.

실제로 아동 문학에서 이처럼 권위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아이들의 자아 효능감(self-efficacy)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자아 효능감이란 특정 상황에서 자신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리키는 심리학 개념입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체셔 고양이, 모자 장수, 하트 여왕. 이 세 캐릭터를 연결해서 보면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좀 더 선명해집니다. 실체 없이도 남는 것들, 언어라는 약속의 불완전함, 권위의 허구성. 아이들과 함께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그 아이들보다 제가 더 많이 배웠습니다.

이 책은 어른이 다시 읽을 때 비로소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완역본으로 읽는 것을 권하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아이들용 발췌본에는 이 날카로운 날이 많이 다듬어져 있습니다. 말장난 속에 숨겨진 논리의 균열, 카오스 속에서 정체성을 붙드는 앨리스의 태도, 그것을 온전히 느끼려면 원문에 가까운 완역본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QlkYk5iARrY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이초록의 영미문학적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