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다섯 살 때 수업에서 알라스테어 험프리스의 [편안함의 습격]을 읽으며 '안락함이 인간을 어떻게 잠식하는가'를 학문적으로 파고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과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제 머릿속에서 겹쳐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옳은 일을 할 수 있는가.
빌 팔롱이라는 인물과 실존적 용기의 구조
솔직히 이 소설을 처음 펼쳤을 때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석탄을 배달하는 남자의 이야기라는 설정이 이렇게까지 묵직하게 읽힐 줄 몰랐거든요. 주인공 빌 팔롱은 아이린이라는 아내와 다섯 딸을 둔 평범한 노동자입니다. 매일 새벽 어둠 속에 출근해서 석탄을 나르고, 밤늦게 돌아와 잠자리에 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밤마다 잠을 못 이룹니다.
단순한 불면이 아닙니다. 팔롱의 불면은 일종의 실존적 불안(existential anxiety)에 가깝습니다. 실존적 불안이란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심리적 동요로, 철학자 키르케고르와 하이데거가 본격적으로 개념화한 인간 조건의 한 단면입니다. 팔롱이 새벽에 홀로 앉아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를 되묻는 장면은, 화려한 언어 없이도 인간 내면의 공허를 정확하게 포착합니다.
팔롱의 과거도 이 불안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합니다. 그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사회적 낙인과 멸시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면서도 미시즈 윌슨이라는 한 개인의 선의 덕에 겨우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학부 세미나에서 정신분석학 비평을 공부하면서 배운 개념 중에 대타자(Other)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타자란 라캉 이론에서 개인의 욕망과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회적 상징 질서 전체를 가리킵니다. 팔롱은 이 대타자의 구조 안에서 내내 주변부 인간으로 살아왔고, 그 기억이 그를 밤마다 깨어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수녀원 석탄 창고에서 젖은 옷을 입고 웅크리고 있는 세라를 발견했을 때, 팔롱이 처음 보이는 반응이 중요합니다. 그는 즉각 행동하지 않습니다. 수녀 원장에게 돈봉투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 미사에 참석합니다. 이 장면에서 팔롱의 내면 독백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것도 막지 않았고, 돈까지 받았다는 것. 이것이 그를 진짜로 괴롭힙니다.
팔롱이 크리스마스 저녁 수녀원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리는 결단은, 기적적인 영웅의 행동이 아닙니다. 그냥 더 이상 스스로를 견딜 수 없어서 내린 선택에 가깝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종류의 결단이 오히려 더 사람다운 용기에 가깝습니다. 이상적인 신념이 아니라, 위선 속에 계속 살아가는 것이 너무 불편해서 움직이는 것이니까요.
팔롱이 세라와 함께 시내를 걸으며 느끼는 해방감의 묘사는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키건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라고 씁니다. 딸들을 처음 안았을 때조차 이런 기쁨은 없었다고. 이것이 작가가 증명하려는 명제입니다. 옳은 행동은 그 자체로 보상이라는 것.
막달레나 수녀원의 역사와 소설이 던지는 사회적 질문
제가 직접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받은 부분은 수녀원의 묘사가 픽션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수녀원(Magdalene Laundries)의 실제 역사를 토대로 합니다. 막달레나 수녀원이란 18세기부터 1996년까지 아일랜드와 영국 등지에서 운영된 시설로, 미혼모·성폭력 피해 여성·사회적 낙인이 찍힌 여성들을 강제로 수용하여 노동에 착취한 곳입니다. 이 시설에서 여성들이 겪은 인권 침해 실태는 2013년 아일랜드 정부가 공식 사과를 발표할 만큼 역사적으로 심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출처: 아일랜드 정부 공식 자료).
1922년부터 1996년까지 약 74년간 이 구조가 유지되었다는 사실이 제게는 단순한 역사 사건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사회적 순응(social conformity)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회적 순응이란 개인이 집단의 규범과 압력에 굴복하여 자신의 판단을 억제하는 심리적 기제로, 수녀원 시스템이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이 이것입니다. 팔롱의 아내 아일린이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사회적 순응의 민낯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클레어 키건이 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도 제가 주목하는 지점입니다. 거시적인 고발 서사 위주로 쓰지 않습니다. 한 평범한 석탄 배달부의 하루하루를 통해 미시 서사(micro-narrative)로 접근합니다. 미시 서사란 개인의 일상적 경험과 감각을 통해 역사적 구조의 실체를 드러내는 서술 전략입니다. 저는 학부에서 주로 거대 이데올로기 중심의 텍스트를 연구해 왔던 터라, 이런 방식이 오히려 더 날카롭게 독자를 찌른다는 걸 처음엔 과소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읽어보니 틀렸습니다. 개인의 감각을 경유할 때 독자가 느끼는 도덕적 불편함이 훨씬 더 오래 남습니다.
소설이 2024년 한국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맥락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소시민의 방관과 연대의 문제는 오랫동안 공론장에서 반복되어 온 주제입니다. 한국 성인의 사회참여 의식과 공동체 책임감에 관한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상당수가 '남의 일에 개입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답했습니다(출처: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팔롱의 선택이 한국 독자에게 특별히 울림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이 소설에서 팔롱의 내면 변화를 이해할 때 주목해야 할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미혼모 아들이라는 출신 배경이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감수성의 원천이 된다
- 수녀원에서의 첫 번째 실패(침묵과 수용)가 두 번째 결단(행동)의 동기로 작동한다
- 팔롱의 기쁨은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행동 자체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의 실증 사례가 된다
- 아내 아일린의 현실주의적 태도는 팔롱의 이상주의와 대비를 이루며, 이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 작가는 끝내 직접 말하지 않는다
[편안함의 습격]을 통해 제가 배운 것과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증명하는 것은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안락한 자리를 지키는 것이 때로는 적극적인 공모가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공모를 깨는 순간,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종류의 가벼움을 얻게 된다는 것.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얇은 소설입니다. 그런데 읽고 나면 꽤 오래 손을 못 씻은 것 같은 찝찝함이 남습니다. 나는 팔롱이었을까, 아일린이었을까. 제가 직접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질문이 이것이었습니다. 영화 버전도 킬리언 머피의 표정 연기로 이 찝찝함을 훌륭하게 옮겨냈습니다만, 책이 주는 그 특유의 내면 서술의 밀도는 역시 원작에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경험해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