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다섯, 졸업을 앞두고 스펙을 쌓고, 좋은 직함을 얻으려 달려가면서도 그 욕망이 어디서 왔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페터 비에리의 얇은 철학서 한 권이 그 착각의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자기인식 — "원한다"는 느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일반적으로 자기 삶을 결정한다는 것은 외부 압력이 없는 상태, 즉 누구의 강요도 없이 스스로 고른다는 뜻으로 통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절반짜리 정의였습니다.
페터 비에리가 『자기 결정』에서 먼저 짚는 것은 자기 인식(self-awareness)입니다. 여기서 자기 인식이란 단순히 "나는 이걸 원해"라는 표층적 감각이 아니라, "나는 왜 이것을 원하는가"를 끝까지 캐묻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제가 처음 이 책을 정밀하게 분석하던 당시, 청년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자율성 지표 매뉴얼을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 구분 하나가 보고서 전체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느낌 자체는 진짜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추적해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어린 시절 방치나 폭력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돈도 못 버는데 좋은 부모라도 돼야 하지 않겠냐"는 주변의 압박이 내면화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비에리는 이처럼 의식되지 않은 채 흐르고 있는 내적 소용돌이를 감지해내는 것이 자기 결정의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내사(introjection)라고 부릅니다. 내사란 외부의 가치나 기대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며 흡수하는 심리 기제를 말합니다. 미국심리학회(APA)는 이 개념을 자아 경계의 혼란과 연결 지어 설명하는데, 내사가 반복될수록 진짜 자신의 욕망과 외부에서 주입된 욕망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고 밝힙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이 작업은 불편합니다. 열심히 달려온 방향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통과하지 않으면 자기 인식은 결코 완성되지 않습니다.
타율성 — 우리는 얼마나 조종당하고 있는가
자기 인식이 됐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비에리가 특히 날카롭게 경고하는 것은 조종(manipulation)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조종이란 최면이나 노골적인 세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위험한 것은 "세간에서 통용되거나 심지어 높이 평가받는"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은밀한 조종입니다. 텔레비전, SNS, 정치적 수사가 반복적으로 심어주는 성공의 공식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제 자신의 언어적 습관(linguistic habit)을 돌아봤습니다. 언어적 습관이란 특정 환경에서 반복 노출되며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말버릇과 판단 방식을 가리킵니다. 당시 저는 "스펙이 곧 나다", "정량 평가를 통과해야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식의 문장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쓰고 있었는데, 그게 제 생각인지 시스템의 목소리인지를 구분한 적이 없었습니다.
비에리가 제안하는 처방 중 하나가 글쓰기를 통한 기억의 재검토입니다. 그는 기억이 사실을 그대로 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기억은 자신을 보호하거나 설득하기 위해 왜곡되고 덧붙여지거나 삭제됩니다. 이것을 인지심리학에서는 기억의 재구성(reconstructive memory)이라고 부릅니다. 기억의 재구성이란 과거 경험을 회상할 때 원본 그대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지식·기대에 의해 능동적으로 편집된 버전을 떠올리는 현상을 의미합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타율성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에리가 제시하는 핵심 단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자신의 언어적 습관을 인식하고, 그 말이 실제로 내 의도를 반영하는지 점검한다
- 강한 욕망이나 확신이 있을 때, 그 원인이 내부에서 왔는지 외부 압박에서 왔는지 추적한다
- 글쓰기를 통해 상처나 기억을 서술하며, 내가 왜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지 되묻는다
- 미디어와 공동체가 반복 사용하는 언어 공식에 대해 "이것이 정말 옳은 서술 방식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솔직히 이 과정은 불쾌하고 느립니다. 그러나 제 경험상 이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나중에 훨씬 더 큰 공허감이 찾아옵니다.
주체적 삶 — 자기결정은 추상적 이상이 아닙니다
비에리는 자기 결정이 "사치품이나 뜬구름 같은 철학적 이상이 아니라 존엄성과 행복의 구체적 조건"이라고 단언합니다. 저는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과장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커뮤니티 현장에서 청년들과 날것 그대로의 고민을 나누고, 자율성 지표를 실제로 구축해가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비에리가 말하는 자기 결정적 삶은 자아상(self-image)의 구체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자아상이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 즉 현실의 자아와 지향하는 자아 사이의 내적 나침반을 말합니다. 자기 인식과 타율성 제거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이 나침반이 비로소 제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합니다. 내가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을 때, 실제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주변에 따뜻함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거나, 글을 써서 세상에 기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는 식의 전혀 다른 자아상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서 비에리가 특별히 언급하는 도구가 문학입니다. 그는 문학이 내러티브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의 확장을 돕는다고 봅니다. 내러티브 정체성이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하고, 그 이야기의 일관성을 통해 자아를 구성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다양한 삶의 서사를 문학을 통해 간접 경험하면, 내가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굳어있던 틀에 균열이 생깁니다.
제가 이 책을 반복해 읽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 전율을 느꼈던 지점은 바로 여기였습니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조각칼에 제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면했을 때, 그것이 단순한 자기계발의 문제가 아니라 존엄성의 문제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정리하면, 자기 결정은 용기의 문제입니다. 외부 시스템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것이 훨씬 편하고 안전합니다. 그러나 비에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다른 이가 먼저 살아가고 먼저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따라 사는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가져온 가장 실용적인 제안은 간단합니다. 오늘 내가 가장 강하게 원한다고 느끼는 것 하나를 꺼내 놓고, "이건 정말 내 것인가?"라고 한 번만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 질문 하나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꿔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