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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역사적 트라우마, 기억의 서사, 제주 4·3)

by 이초록 Chorock 2026. 6. 4.

이초록의 영미문학적 삶-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손글씨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전공하면서 홀로코스트 텍스트나 남미의 독재 서사 같은 서구 중심의 역사 소설만 읽어왔던 저에게,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솔직히 예상 밖의 충격이었습니다. 수업 과제로 처음 펼쳤다가, 11페이지쯤에서 책을 덮어버렸으니까요. 이 글은 그 충격의 기록입니다.

역사적 배경: 109개의 사라진 마을

이 소설을 제대로 읽으려면 먼저 '제주 4·3 사건'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벌어진 이 비극은,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 주민들을 모두 '빨갱이'로 간주하고 학살한 국가 폭력입니다. 그 결과 제주도에서만 무려 109개의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제주공항 활주로 아래에서 발굴된 유골만 3,829구에 달합니다. 제주도 공항 부지가 가장 많은 학살이 이루어진 장소였다는 사실은, 4·3 진상 조사 결과를 통해 밝혀졌습니다(출처: 제주4·3평화재단). 바다로 떠내려간 시신, 수습조차 되지 못한 유골은 그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저는 비교문학 수업에서 이 소설을 처음 마주하기 전까지, 4·3 사건을 교과서 한 줄 수준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서구의 역사 소설을 분석하던 기존 비평 방법론으로는 이 소설의 층위를 읽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텍스트를 분석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이성주의적 태도, 그 한계를 처음으로 실감한 것이 바로 이 책을 읽으면서였습니다.

소설 속 두 주인공, 경하와 인선이 처음 만났던 시절을 기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지하철역 반대 방향으로 계속 걷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두 사람. 그 묘사를 읽을 때 제가 떠올린 단어는 '공명(共鳴)'이었습니다. 역사의 상처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만 가능한 그 감각.

기억의 서사: 눈과 통증의 기호학

한강의 문학을 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호학(Semiotics)적 독해입니다. 기호학이란 특정 이미지나 사물이 텍스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생산하는지 분석하는 방법론으로, 이 소설에서는 '눈(雪)'이 가장 핵심적인 기표(Signifier)로 작동합니다. 기표란 기호의 형식적 측면, 즉 의미를 전달하는 감각적 재료를 가리킵니다.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 꾼 꿈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더 명확해집니다. 다섯 살 아이의 뺨에 내린 눈이 녹지 않는 꿈. 이 꿈은 단순한 모성의 불안이 아닙니다.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던 날, 싸늘해진 시신의 뺨 위로 눈이 쌓이던 그 광경이 세대를 넘어 반복되는 트라우마적 기억 재현(Traumatic Re-enactment)입니다. 트라우마적 기억 재현이란 과거의 충격적 경험이 현재의 꿈이나 환각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저는 수업 중에 이 장면을 분석하면서, 제도권 학문이 타인의 고통을 얼마나 손쉽게 '분석 대상'으로 납작하게 만드는지를 절감했습니다. 강의 노트를 채우는 손이 멈춘 것은 그 순간이었습니다.

한강이 이 소설에서 구성하는 핵심 이미지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내리는 눈(雪): 기억을 덮고 망각을 강요하는 국가 폭력의 상징
  • 잘린 손가락과 통증: 아프지만 신경을 살리기 위해 반드시 계속 찔러야 하는 행위 — 역사를 기억하는 일의 메타포
  • 새의 뼈: 무게를 줄이기 위해 구멍이 뚫려 있는 구조, '소년이 온다'의 피 빠진 몸과 겹치는 죽음의 이미지
  • 촛불과 그림자: 단전된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연대의 상징

특히 손가락이 잘린 인선이 경하에게 전하는 말이 저에게는 이 소설 전체의 테제처럼 읽혔습니다. "피가 멈추면 안 돼. 신경이 계속 연결되려면 아파도 찔러야 해." 4·3 사건을 기억하는 일이 바로 그 통증과 같다는 것. 국가가 수십 년 동안 이 사건을 교과서에서 지우고 금기어로 만든 이유가 바로 그 통증을 멈추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 문장 하나로 무섭도록 선명해집니다.

제주 4·3: 문학이 기억하는 방식

그렇다면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다큐멘터리적 밀도로 끌어들이면서도, 그것을 살아 있는 관계의 언어로 번역한다는 점입니다. 인선이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온 인물이라는 설정은 이 서사 전략과 맞물립니다. 인선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4·3의 증언은 차갑고 딱딱한 역사 기술이 아니라, 오빠를 찾아 헤매던 한 여자의 발걸음 소리처럼 들립니다.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의 관점에서도 이 소설은 독특합니다. 서사 구조란 이야기가 시간적·공간적으로 어떻게 배치되고 전달되는지의 방식을 말합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선형적 시간을 따르지 않습니다.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 어쩌면 평행 우주까지가 뒤섞이면서 독자는 방향을 잃게 됩니다. 그 혼돈이 오히려 학살 이후 생존자들이 느끼는 시간 감각, 즉 과거가 현재 속으로 계속 침투해 들어오는 감각과 정확히 공명합니다.

제가 직접 이 소설을 원전으로 읽고 분석하면서 가장 오래 멈췄던 문장은 사실 따로 있습니다. "나는 이 새를 사랑한 적이 없는데 왜 우나." 경하가 아마를 묻어주면서 하는 독백입니다. 사랑한 적도 없는 새의 죽음에도 눈물이 나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학살당할 수 있었는가. 이 비약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비약을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애도의 정치학(Politics of Mourning)'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누구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애도받고, 누구의 죽음은 침묵 속에 묻히는가를 분석하는 시각으로,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발전시킨 개념입니다. 4·3 사건의 희생자들은 수십 년간 이 애도의 정치학에서 배제되어 왔습니다(출처: 한국역사연구회). 한강이 이 소설에서 하는 일은 그 배제를 문학의 언어로 되돌리는 작업입니다.

결국 '작별하지 않는다'는 우리가 무엇과 작별하지 않아야 하는가를 묻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제주도 공항에 내릴 때 발아래 땅이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 감각의 변화가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의 본질일지 모릅니다. 4·3을 영화나 드라마로 접할 기회가 여전히 드문 지금, 이 소설이 그 기억을 살아 있는 통증으로 전달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이 책을 강력히 권합니다. 읽는 동안 여러 번 덮고 싶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충동이 드는 순간마다, 책을 다시 펼치는 것이 맞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uy6su_amc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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