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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초인 사상, 다성적 서사, 구속적 고난)

by 이초록 Chorock 2026. 5. 12.

이초록의 영미문학적 삶-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손글씨

신념 하나가 사람을 살인자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저는 이 명제를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통해 처음으로 체감했습니다. 학부 시절 '러시아 소설의 이해' 강의에서 죄와 벌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법학을 중퇴하고 전당포에 물건을 팔아 연명하는 가난한 청년의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현재의 이야기일 줄은 몰랐습니다.

초인 사상이라는 지적 유혹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논문 한 편을 씁니다. 인간을 '범인(平凡人)'과 '비범인(非凡人)'으로 나누고, 비범인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법률을 초월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초인 사상이란 19세기 유럽 철학에서 발전한 개념으로, 특출난 개인이 도덕과 법의 테두리 밖에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가 나폴레옹을 예시로 든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한 전쟁을 일으켰지만 역사는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지 않습니까.

제가 비좁은 자취방에서 전공 서적들과 씨름하던 시절, 이 논리가 주는 유혹이 어떤 것인지 솔직히 이해가 됐습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가진 것은 없는데 생각만 많은 상태, 그 상황에서 '나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믿음은 일종의 탈출구처럼 기능합니다. 라스콜니코프가 꼭 특수한 인물이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선택한 대상은 동네의 전당포 할머니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돈을 착취하는 구조의 상징이었죠. 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악인의 돈을 빼앗아 선한 목적에 쓴다면, 그 행위는 정당하다. 여기서 공리주의(Utilitarianism)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공리주의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윤리의 기준으로 삼는 사상으로, 결과가 좋으면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라스콜니코프의 범행은 바로 이 논리의 극단적 실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끼로 할머니를 죽이고 현장을 목격한 이복 동생까지 살해한 뒤, 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도망칩니다. 완벽한 논리가 처참한 현실 앞에서 무너지는 장면입니다.

다성적 서사가 드러내는 균열

도스토옙스키가 이 소설에서 구사한 핵심 기법은 다성적 서사(Polyphonic Narrative)입니다. 다성적 서사란 작가가 단일한 목소리로 주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물이 각자의 논리와 가치관을 동등하게 펼치는 서술 방식을 말합니다. 문학 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이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분석하면서 정립한 개념이기도 합니다(출처: 미하일 바흐친, 도스토옙스키 시학의 문제).

이 서사 구조 안에서 예심 판사 포르피리는 라스콜니코프의 논문을 읽고 그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합니다. 그가 건네는 말이 섬뜩합니다. "당신이 사상을 갖고 있듯, 저의 개인적인 사상은 당신을 자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논리 대 논리의 대결입니다. 그런데 결국 라스콜니코프를 무너뜨린 것은 포르피리의 날카로운 추리가 아니었습니다.

살인 이후 라스콜니코프는 정신 질환에 가까운 심리적 붕괴를 경험합니다. 저는 세미나 시간에 동기들과 이 지점을 오래 토론했습니다. 그가 무너진 것이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비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인지에 대해서였습니다. 제 판단은 후자에 더 가깝습니다. 그는 자수를 결심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은 결국 범인(平凡人)이었던 것이 아닐까. 이 지점이 초인 사상의 가장 큰 모순입니다. 성공 여부로 도덕성을 판단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윤리적 파탄입니다.

라스콜니코프의 심리적 붕괴를 보여주는 핵심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살인 직후 지속되는 고열과 환각 상태
  • 경찰서에서 살인 사건 이야기가 나오자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장면
  • 자신이 비범인임을 증명하려는 충동과 들킬 것이라는 공포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
  • 포르피리와의 대화 속에서 스스로 논리적 자멸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

구속적 고난이 이성을 이기는 방식

소냐는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폐결핵을 앓는 계모를 부양하기 위해 매춘을 하는 인물입니다. 라스콜니코프의 눈에 그녀는 비합리의 총집합입니다. 희생해도 나아지지 않고, 믿어도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녀는 왜 무너지지 않느냐고 그는 물었습니다. 소냐의 답은 단순했습니다.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죠."

여기서 도스토옙스키가 제시하는 개념이 구속적 고난(Redemptive Suffering)입니다. 구속적 고난이란 고통 자체를 회피하거나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인간이 도덕적으로 정화되고 구원에 이른다는 사상을 말합니다. 영미 문학 전통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서사 원형이지만, 도스토옙스키가 이것을 다루는 방식은 훨씬 직접적입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들을 읽으며 느낀 것은, 소냐가 라스콜니코프를 설득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녀는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살았습니다. 아버지 마르멜라도프가 마차에 치여 죽어갈 때 그의 아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남편을 죽도록 미워하면서도 신부를 불러 마지막을 기립니다. "그러면 저건 죄가 아닌가요? 그럼에도 난 지금 저 사람을 용서하고 있다고요." 이 문장이 저는 소설 전체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논리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발산하는 무게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소설을 쓴 1866년 러시아는 니힐리즘(Nihilism)이 지식인 사회를 강타하던 시기였습니다. 니힐리즘이란 기존의 도덕·종교·사회 체계를 전면 부정하고 모든 것을 허무로 돌리는 사상으로, 당시 러시아 청년 지식인들 사이에서 차르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급진적 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됩니다(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Nihilism). 라스콜니코프는 바로 그 시대의 산물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를 통해 신앙과 인간에 대한 존중 없이 벌어지는 혁명이 어디로 귀결되는지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결국 라스콜니코프는 자수를 선택합니다. 이성과 논리로 구축된 그의 세계가 소냐의 단순한 삶의 방식 앞에서 천천히 무너진 결과입니다. 저는 이 결말을 처음 읽었을 때 "이게 패배인가, 구원인가"를 한참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 두 가지가 같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신념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순간이 가장 처절한 패배이면서 동시에 인간으로 돌아오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가진 믿음이 나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이 소설을 읽은 뒤 한 번쯤 점검해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zXaXRrEYQ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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