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업 시간에 처음 이 책을 펼쳤던 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인문학 전공자로서 늘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텍스트에 익숙했던 저에게, 지리와 생물학과 역사를 한꺼번에 꿰뚫는 이 책의 시선은 낯설고도 강렬했습니다. 왜 어떤 문명은 앞서고 어떤 문명은 뒤처졌는가. 그 질문의 답이 인종이 아니라 환경에 있다는 것을, 750페이지 분량의 근거로 증명해내는 책이 바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입니다.
환경결정론, 인종주의를 뒤집다
"백인이 더 똑똑해서 앞서간 것 아닐까?" 이런 직관적인 의심, 저도 처음에는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는 이 질문 자체를 정면으로 해체합니다.
환경결정론(Environmental Determinism)이란, 인간 문명의 발전 양상이 개인이나 민족의 선천적 우열이 아니라 지리적·생태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이 시각으로 지난 1만 3천 년의 역사를 분석합니다.
예를 들어 북유럽 국가들은 지난 1천 년간 인류 문명에 결정적인 기여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 수천 년간은 거의 아무런 문명사적 흔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같은 고위도 지역이라도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왜 유럽과 같은 기술 발전을 이루지 못했는가. 이 모순을 설명하려면 기후나 위도가 아닌 다른 변수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대륙의 축 방향입니다. 유라시아 대륙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어 비슷한 위도의 지역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후 조건이 유사하면 작물이나 가축, 기술이 전파되기 쉽습니다. 반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남북으로 뻗어 있어, 열대 우림·사막·고산지대 같은 이질적인 기후대가 중간에 끼어들어 기술 전파를 차단합니다.
제가 수업에서 이 대목을 처음 분석했을 때, 그 단순한 지리적 사실이 얼마나 거대한 역사적 결과를 낳았는지를 실감하며 강의 노트를 손으로 빠르게 채워 내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인종적 우월성이라는 가짜 서사가 얼마나 허약한 근거 위에 세워진 것인지, 지도 한 장으로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지적하는 핵심은 이렇습니다. 오늘날 유럽이나 동아시아 문명이 먼저 발전한 것은 그 지역 사람들이 특별히 우수해서가 아니라, 기원전 1만 1천 년경 마지막 빙하기 이후 우연히 주어진 지리적 조건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대륙의 배치가 역사를 만든 셈입니다.
문명격차를 만든 가축화와 작물화
그렇다면 그 지리적 조건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문명의 격차를 만들어냈을까요?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지적 전율을 느꼈던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작물화(Domestication of Plants)란 야생 식물 중에서 인간이 식량으로 재배하기 적합한 종을 선별해 농업의 기초로 삼는 과정입니다. 인류가 초기에 집중적으로 재배한 8가지 핵심 작물, 즉 밀·보리·완두·렌즈콩 등이 우연히도 메소포타미아 지역 근처에서 잡초처럼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지역 사람들이 더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곳에 그 식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주나 미국 서부 같은 지역에는 이 8종 중 극히 일부만 자라고 있었습니다. 작물화의 출발선 자체가 달랐던 것입니다.
가축화(Domestication of Animals)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축화란 야생 동물을 인간의 목적에 맞게 길들여 식량·노동력·운송 수단으로 활용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가축화에 성공한 동물이 되려면 다음 조건을 대부분 갖춰야 합니다.
- 초식성 또는 잡식성일 것
- 성체 크기가 충분히 클 것
- 성격이 온순하여 길들이기 가능할 것
- 감금 상태에서도 번식할 수 있을 것
- 성장 속도가 빠를 것
인류가 역사적으로 가축화에 성공한 대형 포유류는 14종뿐입니다(출처: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균쇠 원전). 그리고 이 14종 중 대부분이 유라시아 대륙에 분포해 있었습니다. 남아메리카 대륙 전체에서 이 조건을 충족한 동물은 라마 단 한 종뿐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 대목을 처음 읽을 때 가장 강렬하게 와닿는 것은, 마야 문명이 바퀴를 독자적으로 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용화할 수 있는 동물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안데스 산맥 주변의 라마와 중앙아메리카의 바퀴는 남북 방향의 지리적 장벽 때문에 끝내 결합되지 못했습니다. 이 둘이 만났더라면 아메리카 문명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기술이 있어도 전파되지 못하면 없는 것과 같다는 사실, 그게 저에게는 이 책에서 가장 무거운 문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농경이 자리잡으면서 잉여 농산물이 생겼고, 잉여 식량은 인구 집중을 낳았으며, 인구 집중은 도시와 정치 체제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연쇄 반응의 출발점이 그냥 어느 땅에 어떤 잡초가 자라고 있었는가의 문제였다는 것이, 저에게는 지금도 낯선 충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총·균·쇠가 만든 역사의 비극
이 책의 제목을 이루는 세 단어는 15세기 말 두 대륙이 처음 만났을 때 어느 쪽이 압도적 우위에 섰는지를 설명하는 세 가지 열쇠입니다. 총은 무기와 과학기술을, 쇠는 철기 문명과 농업 생산성을, 균은 가축화 사회가 오랜 시간 동안 축적해온 면역력을 상징합니다.
이 세 요소 중에서 제가 읽으면서 가장 끔찍하게 느꼈던 것은 균, 즉 병원균(Pathogen)의 문제였습니다. 병원균이란 인간이나 동물에게 감염성 질환을 일으키는 세균·바이러스 등을 통칭합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면서 함께 가져간 천연두·홍역·흑사병 등 수십 종의 전염병이 원주민들을 초토화했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질병은 매독 정도가 유일하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처음 도착했을 때 원주민 인구는 약 2천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100년이 지난 뒤에는 약 100만 명이 남았습니다. 95%가 사라진 것입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WHO) 역사적 전염병 기록). 전쟁도 원인이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세균이었습니다.
왜 유럽인들은 이 전염병에서 살아남았을까요? 수천 년간 가축과 함께 살아온 농경 문명이 그 답입니다. 인수공통감염병(Zoonosis), 즉 동물에서 인간으로 옮겨오는 전염병은 가축화된 환경에서 주로 발생합니다. 유럽인들은 이 과정을 오래 겪으며 면역 체계를 단련했습니다. 반면 대규모 가축화 경험이 거의 없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유럽의 병원균은 무방비 상태의 재앙이었습니다.
피사로가 200명도 안 되는 병사로 수만 명의 잉카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피사로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천연두가 잉카 제국을 내부에서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총과 쇠보다 먼저 균이 싸웠던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저는 환경이라는 구조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학과 안의 보이지 않는 경쟁 질서 속에서 스스로가 환경에 종속된 것처럼 느꼈던 그 감각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의 시선은 숙명론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불평등의 원인이 인종이 아닌 구조에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는 사실 자체가, 그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총, 균, 쇠]는 거대한 역사를 다루면서도, 결국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으로 독자를 이끕니다. 750페이지가 부담스럽다면 4번과 5번 챕터, 즉 대륙의 축과 가축화·작물화 부분만 먼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역사를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찬사를 보낸 한글의 우수성에 관한 7번 챕터도, 한국 독자라면 특별한 감회로 읽히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