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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배경·맥락, 다성적 서사, 정체성 각성)

by 이초록 Chorock 2026. 7. 13.

이초록의 영미문학적 삶- 평범한 인생 카렐 차페크 손글씨

스물다섯, 졸업을 앞두고 극단에서 각색 작가로 활동하던 저는 심각한 슬럼프 속에 이 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은 그 시기 제 사유의 축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은 소설입니다. 당신은 지금 자신의 삶이 너무 평범하다고 느끼시나요? 이 소설은 그 '평범함'이 사실 얼마나 거대한 착각인지 정면으로 묻습니다.

죽음 앞에서 펜을 든 철도원, 그 배경과 맥락

솔직히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제가 각색 레퍼런스로 쓸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습니다. 주인공이 은퇴한 철도원이고, 그가 스스로 자신의 삶은 아무런 사건도 없는 아주 단선적인 것이었다고 단언하면서 회고록을 쓰기 시작하는 구조였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이 설정 자체가 극적 긴장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카렐 차페크는 체코의 국민 작가로, 1920년 희곡 『R.U.R.』에서 '로봇(Robot)'이라는 단어를 세계 최초로 사용한 작가입니다. 여기서 로봇의 어원인 체코어 '로보타(robota)'란 노동 또는 고역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미 기술 문명과 인간성의 충돌을 오래전에 예견했던 작가답게, 『평범한 인생』에서도 그는 '기계처럼 작동한다'고 스스로 규정한 한 인간의 삶을 해부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 소설이 쓰인 1930년대 중유럽은 파시즘과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개인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지켜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차페크는 한 평범한 노인의 회고를 통해 증명해 보입니다. 자전적 글쓰기(autobiographical writing)란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행위가 아니라, 기억의 층위를 파헤치며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실존적 작업임을 이 소설은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자전적 글쓰기란 개인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서술하는 문학 형식으로, 기억과 자아 인식이 어떻게 서로를 재편하는지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소설을 각색 레퍼런스로 선택한 이유도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살리려면, 그 인물 내면의 균열과 모순을 구조적으로 설계해야 합니다. 그 설계도로서 이보다 정밀한 텍스트를 저는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나의 삶 속에 숨어 있던 여덟 개의 자아, 다성적 서사의 해부

이 소설의 핵심은 주인공이 글을 쓰면 쓸수록 자신이 믿어온 '평범한 나'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 균열의 언어가 바로 다성적 서사(Polyphonic Narrative)입니다. 다성적 서사란 단일한 화자의 목소리가 아닌, 내면에서 서로 충돌하는 복수의 목소리가 동시에 전개되는 서술 방식을 말합니다. 소설 이론가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이 이 개념을 정립했으며,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분석하며 인간의 내면은 단일한 진실이 아닌 복수의 의식들이 교전하는 장임을 주장했습니다(출처: 문학비평 개념 사전, 한국문학번역원).

제가 극단 연습실에서 배우들과 이 장면을 분석하던 날이 기억납니다. 소설 속에서 두 내면의 목소리가 서로 고등학교 시절을, 첫사랑을, 철도원이 된 이유를 두고 다투는 장면을 처음 큰 소리로 읽었을 때, 연습실이 잠깐 조용해졌습니다. 누군가 "이거 저 얘기 같은데요"라고 중얼거렸고, 저도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건 제 얘기이기도 했으니까요.

주인공의 내면에서 발견되는 자아는 총 여덟 가지로 분류됩니다. 성실한 철도 공무원, 우월감에 집착했던 소년, 어머니의 그늘 아래 우울을 떨치지 못한 자, 결혼 생활 내내 억눌렀던 낭만주의자, 전쟁 속 영웅적 저항자, 거짓과 계산 속에 감추어진 현실주의자, 모든 것을 버리고 싶었던 도피자, 그리고 신을 향해 손을 뻗은 구도자. 이 자아들 하나하나가 독립된 목소리를 가지고 서로를 공격하고 반박합니다. 이 구조를 정신분석학에서는 내적 대상(Internal Objec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내적 대상이란 개인이 무의식 속에 내면화한 타자의 표상으로, 자아와 별개의 목소리로 작동하며 행동과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구조물입니다.

주인공이 자신이 역장의 딸과 결혼한 이유를 두고 내면의 두 목소리가 다투는 장면은 특히 압도적입니다. 한쪽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처가 덕에 출세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반박합니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요? 차페크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두 목소리가 모두 진실이라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입니다.

주인공이 발견한 여덟 가지 자아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성실한 철도 공무원: 스스로 믿어온 유일한 정체성
  • 우월감에 집착한 소년: 열등감을 역전시키려 학업에 매달렸던 자
  • 우울증 환자: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내면
  • 억눌린 낭만주의자: 결혼 생활 내내 감추어 두었던 욕망
  • 전쟁의 영웅: 독일군 수송을 교란시키며 목숨을 걸었던 순간
  • 계산적 현실주의자: 출세와 안정을 향해 움직인 속내
  • 도피를 꿈꾼 자: 모든 것을 버리고 성당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던 충동
  • 구도자: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신을 발견하려 한 자

단일한 프로필이라는 환상, 그리고 정체성 각성의 실전 의미

당신도 이력서를 쓰거나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자신을 규정하려 애쓴 경험이 있지 않으신가요? 저는 그 압박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 준비를 병행하던 그 시기, 저는 극단 각색 작가로서의 저와, 취업 시장이 요구하는 스펙으로 포장된 저를 동시에 연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중성이 너무 괴로워서 결국 어느 쪽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무기력함에 빠졌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부릅니다. 인지 부조화란 개인이 두 가지 이상의 상충하는 신념이나 역할 사이에서 심리적 불편감을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불편감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은 대체로 하나의 자아를 억압하거나 부정하는 방향을 선택합니다. 그게 저였습니다.

『평범한 인생』이 제게 준 각성은 바로 그 억압을 멈추는 것이 구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여덟 개의 자아를 발견하고 나서 공포에 빠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자아를 껴안은 채 타인의 삶도 자신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바라보게 되는 결말은, 당시 저에게 실제로 심리적 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자아 정체성 연구의 권위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건강한 자아 정체성이란 단일한 역할에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 다양성을 통합하는 능력에서 온다고 주장했습니다(출처: 에릭슨 발달이론, 미국심리학회). 차페크가 1934년에 쓴 이 소설은 그 심리학적 통찰을 문학적 언어로 이미 완성해 놓은 셈입니다.

제가 이 소설을 20대의 누군가에게 권한다면, 그건 이 책이 '위로'를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책은 오히려 불편합니다. 읽다 보면 자꾸 자신의 숨겨진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하거든요. 그 불편함을 정면으로 견디고 나면, 자신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경험이야말로 이 소설이 주는 진짜 선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번 써 내려가 보시기를 권합니다. 아마 생각보다 훨씬 많은 목소리들이 당신 안에서 살아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발견이 타인을 대하는 방식까지도 바꿔 놓을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은, 절대 평범하지 않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BaC2RIuo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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