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 수업에서 원전을 처음 펼쳤을 때, 저는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제가 알던 '머리에 볼트 박힌 녹색 괴물'은 어디에도 없었거든요. 대신 밀턴의 실낙원을 읽으며 자신의 존재를 고뇌하는, 처절할 만큼 인간적인 존재가 있었습니다. 메리 셸리가 불과 18세에 완성한 이 소설은, 읽을수록 단순한 공포 소설이 아니라 창조주의 윤리와 사회적 배제를 날카롭게 해부한 텍스트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낭만주의 과학이 빚어낸 비극의 배경
제가 처음 이 소설을 분석하면서 가장 먼저 부딪힌 질문은 "이게 과학을 비판하는 소설인가, 아닌가"였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이분법 자체가 틀렸습니다.
메리 셸리가 살았던 19세기 초는 낭만주의(Romanticism)가 절정에 달하던 시대였습니다. 여기서 낭만주의란 이성과 제도에 맞서 개인의 감성, 직관,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운 문예 사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메리의 주변 인물들, 연인 퍼시 셸리, 시인 바이런, 그리고 메리 자신은 평범한 낭만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일부 영문학자들이 '후기 낭만주의(Late Romanticism)'라고 부르는 독특한 갈래에 속했는데, 이들은 과학을 이성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낭만의 구현으로 바라봤습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뉴턴의 사과처럼 번뜩이는 직관과 창의력으로 진리를 포착하는 과학은 이들에게 낭만 그 자체였습니다. 소설 속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차갑게 계산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창조의 열망에 불탄 낭만주의 과학자였습니다.
메리의 인생 자체가 이 배경을 증명합니다. 무정부주의자 아버지와 페미니즘 선구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6세에 유부남 퍼시와 야반도주를 감행했던 그녀의 삶은 '신념대로 산다'는 낭만의 실천이었습니다. 고딕 소설(Gothic Novel) 특유의 음산한 분위기를 빌려 쓴 이 작품은 그 삶의 직접적인 산물이었습니다. 고딕 소설이란 공포, 죽음, 초자연적 요소를 통해 인간의 심리적 어둠을 탐구하는 소설 장르를 가리킵니다.
누가 진짜 괴물인가, 피조물의 고독과 타자화
'영국 낭만주의 문학' 수업에서 리포트를 쓰면서 저는 이 질문을 제목으로 걸었습니다. "누가 진짜 괴물인가." 당시 교수님께서 꽤 좋은 질문이라고 하셨는데, 직접 겪어보니 이 질문은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었습니다.
소설 속 피조물은 처음부터 악하지 않습니다. 그는 숲속 가난한 가족들을 몰래 도우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밀턴의 실낙원을 읽고 스스로의 존재론적 근원을 탐색합니다. 문학 텍스트를 통해 감정과 언어를 습득하는 이 장면은 제가 원문으로 필사하면서도 전율이 느껴질 만큼 강렬했습니다. 언어가 한 존재의 상처를 이렇게 날카롭게 해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괴물이 파괴적으로 변하는 과정을 영문학에서는 심리 비평(Psychological Criticism)의 시각으로 분석합니다. 심리 비평이란 인물의 내면 심리와 무의식적 욕망을 중심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는 비평 방법론입니다. 이 관점에서 괴물의 복수는 단순한 악의가 아니라 자아 정체성을 찾으려는 갈망이 사회적으로 철저히 거부당했을 때 터져 나오는 실존적 절규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개념이 타자화(Othering)입니다. 타자화란 특정 집단이나 개인을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규정하여 배제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뜻합니다. 작중에서 괴물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상냥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해도 서로를 아끼고 소소한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들조차 괴물의 외모를 보는 순간 두려움과 혐오로 반응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기준이 한 존재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그 잔혹한 메커니즘을 고스란히 느꼈습니다.
메리가 이 모든 걸 쓴 건 단순한 상상이 아니었습니다. 언니는 방치와 냉대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여동생은 바이런에게 철저히 버려졌습니다. 낭만이라는 신념은 순수했지만, 그 신념이 세상과 충돌하는 방식은 잔인했습니다. 메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완성하기 전에 이미 아이를 잃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경험은, 소설 속 괴물이 느끼는 고독과 정확히 포개집니다.
낭만주의 문학을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메리 셸리는 당대 여성 작가로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사회 구조 비판과 개인의 실존 문제를 동시에 다뤘다고 평가받습니다(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소설이 다루는 핵심 대립 구조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창조주 빅터 프랑켄슈타인: 오만(Hubris), 창조에 대한 무책임, 낭만적 열망의 과잉
- 피조물(괴물): 사랑과 인정의 결핍, 존재론적 고독, 본성과 다른 귀결
- 탐험가 월턴: 낭만의 열망을 품되 현실을 직시하고 멈출 줄 아는 인물
- 일반 사회: 외모와 선입견으로 타자를 배제하는 집단적 메커니즘
200년 후에도 유효한 창조의 윤리
제가 이 소설을 오늘 다시 꺼내 든 건 최근의 인공지능 논쟁 때문이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200년 전 소설이 이렇게 정확하게 지금 시대를 짚어낼 줄은 몰랐거든요.
소설 속 빅터가 저지른 핵심 실수는 창조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책임지지 않은 것입니다. 골방에 틀어박혀 창조에만 몰두한 그는 교수의 조언도, 가족의 우려도 흘려들었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존재는 애당초 괴물이 될 이유가 없었음에도 괴물로서 살고 괴물로서 죽었습니다.
오만(Hubris)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반복되는 개념으로,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할 만큼 과도한 자만심을 갖게 될 때 파멸을 맞이한다는 서사 구조를 의미합니다. 메리 셸리는 이 고전적 개념을 빌려 근대 과학의 맹점을 정면으로 겨냥했습니다.
현재 인공지능 윤리 논의에서도 동일한 질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창조물이 자율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할 때 창조주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유네스코의 AI 윤리 권고안에 따르면 AI 시스템 개발자는 시스템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포괄적인 책임을 진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출처: UNESCO).
제 경험상 이 소설을 단순히 "과학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소설"로 읽으면 절반밖에 못 읽은 겁니다. 진짜 메시지는 더 날카롭습니다. 아무리 순수한 신념에서 출발했더라도, 그 신념이 세상과 맞닿는 방식을 외면하면 결국 괴물을 만들어낸다는 것. 월턴이 비극을 피한 이유는 낭만이 없어서가 아니라, 멈춰서서 주변을 돌아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이 만들어낸 것이 괴물처럼 보인다면, 그건 정말 그것이 괴물이어서인가요. 아니면 당신이 처음부터 괴물처럼 만들었기 때문인가요.
메리 셸리의 소설을 아직 원전으로 읽지 않으셨다면, 번역본이라도 한 번은 직접 펼쳐보시길 권합니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얼굴로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