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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의 쓸모 (이유의 유형, 사회적 관계, 인과론) 이유를 잘 대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저는 세미나 발제를 준비하면서 이 전제가 절반은 틀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건 '정확한 이유'가 아니라 '상황에 맞는 이유'라는 것, 사회학자 찰스 틸리의 저서 왜의 쓸모가 이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이유의 유형: 우리가 쓰는 말에는 구조가 있다일반적으로 이유를 대는 행위는 논리적이고 정확할수록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꽤 다릅니다. 스물다섯 살에 영문학과 비교문학 연계 세미나에서 이 책을 텍스트로 다루면서, 저는 오히려 정확한 이유가 대화를 망치는 순간을 수도 없이 목격했고 직접 겪기도 했습니다.찰스 틸리는 인간이 이유를 대는 방식을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관습(convention), 이야기(s.. 2026. 6. 23.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명언 출처, 인용, 오리지널리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스물다섯 살 때까지 명언을 꽤 신봉하는 편이었습니다. 누군가 SNS에 올린 문장에 감동받고, 그걸 노트에 적고, 마치 그 말이 제 삶을 구원해 줄 것처럼 믿었습니다. 그러다 영문학과 비교문학 세미나에서 이 소설을 처음 텍스트 분석 대상으로 만난 뒤로, 명언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홍차 티백 꼬리표 하나에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불편하고, 그래서 더 오래 남는 책입니다.명언 출처, 실제로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이 소설의 핵심 설정은 단순합니다. 일본 최고의 괴테 연구자가 결혼기념일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홍차 티백 꼬리표에 적힌 문장 하나를 발견합니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출처는 괴테. 그런.. 2026. 6. 22.
아몬드 (감정 결핍, 공감 능력, 인간관계) 공감을 잘 못한다는 게 진짜 문제일까요, 아니면 공감하는 척만 하는 게 더 큰 문제일까요? 손원평의 소설 아몬드를 영어 번역본과 원문을 나란히 놓고 분석하던 날, 저는 그 질문 앞에서 꽤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이 오히려 감정 과잉의 시대를 꿰뚫어 본다는 역설이 그렇게 선명하게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감정 결핍이 폭로하는 것들주인공 선윤재는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을 안고 태어납니다. 여기서 감정표현불능증이란 뇌의 편도체(Amygdala) 크기가 매우 작아 감정을 인지하고 언어로 옮기는 능력 자체가 제한된 상태를 말합니다. 편도체는 공포, 슬픔, 기쁨 같은 정서 반응을 처리하는 뇌 구조물로, 아몬드와 비슷한 모양이라는 이유로 소설의 제목이 됩니다.윤재의 엄마는 아.. 2026. 6. 21.
인터메초 (심리 리얼리즘, 의식의 파편, 간주곡) 소설 한 권이 세미나실에서 저를 밤새 붙잡아 둔 적이 있습니다. 샐리 루니의 [인터메초]였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10살 터울 형제가 각자의 방식으로 무너지고 버티는 이야기인데, 읽는 내내 '이건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누군가다'라는 감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어떤 소설이 독자를 이렇게 잡아끄는 걸까요.심리 리얼리즘, 인물의 내면을 어떻게 이렇게 뚫고 들어오나샐리 루니는 1991년생 아일랜드 작가로,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독자를 확보한 스타 작가입니다. [인터메초]는 그녀의 최신작으로, 국내에서도 이미 [노멀 피플]로 팬층을 형성한 작가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출간 전부터 화제가 됐습니다.제가 영문학 및 비교문학 세미나에서 이 텍스트를 원전으로 다뤘을 때 가장 먼저 직격탄처럼 느꼈던 건 심.. 2026. 6. 20.
그녀를 지키다 (서사 구조, 보호 본능, 실존적 자아) 솔직히 저는 처음에 이 소설을 잘못 읽었습니다. 600페이지짜리 장편을 손에 쥐고 단순한 러브 스토리를 기대했는데, 읽고 나서야 이게 누군가를 '지킨다'는 행위 자체를 해부한 소설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스물다섯의 저에게 꽤 불편한 방향으로 돌아왔습니다.서사 구조가 던지는 첫 번째 신호장 바티스트 앙드레아의 소설 『그녀를 지키다』는 1986년, 한 수도원에서 임종을 앞둔 노인의 시점으로 시작합니다. 수도사들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가운데, 죽은 줄 알았던 그가 갑자기 눈을 뜨고 입을 달싹입니다. 그 문장으로 첫 챕터가 끝나고, 다음 챕터의 첫 문장은 "물론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고 있다"로 시작됩니다. 제가 이 도입부를 처음 읽었을 때, 이건 단순한 액자식 구성이 아니라는.. 2026. 6. 18.
팩트풀니스 (인지편향, 공포본능, 부정본능) 뉴스 앱을 열 때마다 세상이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신 적 있습니까. 저는 스물다섯 무렵, 미디어가 쏟아내는 재난과 갈등 보도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막연한 종말감 같은 것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때 영문학 세미나에서 원전으로 읽게 된 책이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였고, 그 책은 제 세계 인식 방식을 꽤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습니다.침팬지보다 낮은 정답률이 말해주는 것 — 인지편향의 구조한스 로슬링은 전 세계 12,000명을 대상으로 세계의 현황을 묻는 3지선다 문제 12개를 출제했습니다. 응답자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도 있었고, 각국의 정치인과 대기업 CEO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평균 정답 수는 2개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위로 찍는 침팬지라면 수학적으로 4개를.. 2026.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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