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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임상 서사학, 신경학적 결손, 마음의 질) 스물다섯 살, 저는 과학전문 도서관이 주최하는 융합 아카데미에서 토론 교재 가이드라인을 집필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해 저는 졸업을 앞두고 수치와 정량 평가만이 존재를 증명한다는 압박 속에서 제 감성과 서사적 정체성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고, 올리버 색스의 이 책을 다시 펼쳐든 것은 그런 맥락에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제 사유의 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임상 서사학이 포착한 신경학적 결손의 진짜 의미임상 서사학(clinical narratology)이란, 환자의 증상을 수치와 진단명이 아닌 살아 있는 이야기로 기록하고 해석하는 의학적 글쓰기 방법론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병명이 아니라 그 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 전체를 텍스트로 삼는 것입니다.올리버 색스는 신경학자이자 저술가.. 2026. 7. 16.
흰 (미니멀리즘, 애도 서사, 실존적 여백) 한강의 소설 흰은 65개의 흰 사물 목록으로 시작합니다. 강보, 배냇옷, 소금, 눈, 백지. 저는 처음 이 책을 폈을 때 이것이 과연 소설인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이 책은 소설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가장 깊은 곳에서 꺼낸 기도였습니다.미니멀리즘 서사 구조, 비워냄으로써 증명하는 것이 책의 형식은 일반적인 소설과 다릅니다. 한두 페이지 분량의 짧은 메모들이 모여 한 권을 이루는 구조로, 장르적으로는 리릭 에세이(lyric essay)에 가깝습니다. 리릭 에세이란 시의 언어와 산문의 형식을 교차시켜 단선적 서사 대신 감각과 이미지의 연쇄로 의미를 만들어 가는 산문 장르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이야기를 설명하는 대신 이미지로 느끼게 하는 방식입니다.저는 당시 대안 미술 공.. 2026. 7. 14.
평범한 인생 (배경·맥락, 다성적 서사, 정체성 각성) 스물다섯, 졸업을 앞두고 극단에서 각색 작가로 활동하던 저는 심각한 슬럼프 속에 이 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은 그 시기 제 사유의 축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은 소설입니다. 당신은 지금 자신의 삶이 너무 평범하다고 느끼시나요? 이 소설은 그 '평범함'이 사실 얼마나 거대한 착각인지 정면으로 묻습니다.죽음 앞에서 펜을 든 철도원, 그 배경과 맥락솔직히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제가 각색 레퍼런스로 쓸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습니다. 주인공이 은퇴한 철도원이고, 그가 스스로 자신의 삶은 아무런 사건도 없는 아주 단선적인 것이었다고 단언하면서 회고록을 쓰기 시작하는 구조였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이 설정 자체가 극적 긴장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카렐 차페크는 체코의 국민 작가로, .. 2026. 7. 13.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ㅏ(실존적 고립, 소셜 다이닝, 삶의 열정) 버트런드 러셀은 20세기 최고의 지성 중 하나로 꼽히는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그가 쓴 에세이집 한 권이 스물다섯 살 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스펙과 취업 걱정에만 매몰되어 있던 시절, 이 얇은 책이 던진 질문 하나가 저를 오래 붙잡았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왔습니까?"실존적 고립 속에서 다시 펼쳐든 책영문학과 비교문학을 전공하면서 저는 청년 1인 가구의 정서적 고립을 해소하기 위한 소셜 다이닝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소셜 다이닝이란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이 낯선 이들과 한 식탁에 모여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동 식사 문화를 말합니다. 기획 의도는 분명했지만, 정작 그 가치를 뒷받침할 서사적 언어가 없었습니다. 그때 다시.. 2026. 7. 12.
너무 시끄러운 고독 (실존적 저항, 도구적 합리주의, 북아트) 졸업을 앞두고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던 시절,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게 지금 트렌드에 맞나?'를 반복적으로 되물었습니다. 버려진 책을 해체해서 새로운 오브제를 만드는 업사이클링 북아트 작업이 정말 좋았지만, 그 좋음을 숫자로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그즈음 다시 펼쳐 든 것이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었습니다. 35년간 폐지 압축기 앞에 서 있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속도와 효율에 짓눌려 있던 저를 정면으로 흔들어 놓았습니다.체코 문학의 숨겨진 거장, 흐라발을 먼저 알아야 하는 이유보후밀 흐라발은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함께 20세기 체코 문학의 중심에 놓이는 작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카프카는 독일어로, 쿤데라는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지만 흐라발은 끝까지 체코어를.. 2026. 7. 12.
자기결정 (자기인식, 타율성, 주체적 삶) 스물다섯, 졸업을 앞두고 스펙을 쌓고, 좋은 직함을 얻으려 달려가면서도 그 욕망이 어디서 왔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페터 비에리의 얇은 철학서 한 권이 그 착각의 바닥을 드러냈습니다.자기인식 — "원한다"는 느낌만으로는 부족합니다일반적으로 자기 삶을 결정한다는 것은 외부 압력이 없는 상태, 즉 누구의 강요도 없이 스스로 고른다는 뜻으로 통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절반짜리 정의였습니다.페터 비에리가 『자기 결정』에서 먼저 짚는 것은 자기 인식(self-awareness)입니다. 여기서 자기 인식이란 단순히 "나는 이걸 원해"라는 표층적 감각이 아니라, "나는 왜 이것을 원하는가"를 끝까지 캐묻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제가 처음 이 책을 정밀하게 분석하던 당시, 청년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 2026.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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