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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역사관, 리얼리즘, 실존) 스물다섯 살 세미나실에서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559명의 등장인물, 1860년대를 관통하는 집필 기간,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파도. 그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서사 안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압도적인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딱 하나였습니다. 이걸 이제야 읽었나.역사관: 영웅은 없다, 의지의 총합만 있을 뿐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역사는 나폴레옹 같은 위대한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이름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만드는 것인가.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전체를 통해 이 질문에 집요하게 답합니다. 그의 역사관은 영웅주의적 역사관(Heroic Theory of History)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영웅주의적.. 2026. 6. 27.
피그말리온 (계급과 언어, 주체적 자아, 인격적 존중) 솔직히 저는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단순한 신데렐라 이야기로 받아들였습니다. 꽃 파는 하층민 소녀가 언어 교육을 통해 상류층 숙녀로 변신한다는 구도만 보면 그렇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발제를 준비하면서 텍스트를 파고들수록 이 작품은 오히려 그 신데렐라 환상을 정면으로 해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합니다.계급과 언어: 히긴스의 실험이 드러내는 것조지 버나드 쇼가 1913년에 발표한 희곡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 속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서사를 차용합니다. 원전 신화에서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의 조각가로, 자신이 직접 깎아 만든 상아 여인상 갈라테이아에게 사랑을 품고 아프로디테에게 그 상을 살아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비는 인물입니다. 버나드 쇼는 이 구조를 가져와.. 2026. 6. 26.
전락 (고해 판사, 자기기만, 도덕적 위선) 누군가의 잘못을 마음속으로 단죄한 적이 있으십니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속으로는 이미 판결을 내려버린 그 순간 말입니다. 저는 스물다섯 살에 알베르 카뮈의 《전락》을 처음 읽었고, 그 첫 장부터 등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클라망스의 독백은 저를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고해 판사라는 기괴한 정체성세미나 수업에서 처음 이 소설을 분석했을 때, 저는 클라망스가 스스로를 '재판관-참회자(juge-pénitent)'라고 부르는 대목에서 한동안 멈추었습니다. 재판관-참회자란 타인을 심판할 권리를 얻기 위해 먼저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고해가 목적이 아니라, 고해 자체가 또 다른 지배의 수단이 된다는 것입니다.파리에서 유능한 변호.. 2026. 6. 25.
죽음의 수용소에서 (집행의 망상, 로고테라피, 삶의 의미)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 수업을 듣기 전까지 이 책을 그냥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회고록'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스물다섯, 졸업을 앞두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던 그 시절에 이 책을 펼쳤고, 첫 챕터를 읽다가 한참 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삶의 의미를 붙들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저는 대체 뭘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었던 걸까 싶었거든요.집행의 망상, 그리고 무너지는 순간기차가 아우슈비츠 팻말 앞에서 멈췄을 때, 프랭클 박사는 '나만은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를 정신의학에서는 집행의 망상(delusion of reprieve)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집행의 망상이란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 처형 직전까지 집행이 유예될지 모른다는 비합리적 믿음에 매.. 2026. 6. 24.
왜의 쓸모 (이유의 유형, 사회적 관계, 인과론) 이유를 잘 대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저는 세미나 발제를 준비하면서 이 전제가 절반은 틀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건 '정확한 이유'가 아니라 '상황에 맞는 이유'라는 것, 사회학자 찰스 틸리의 저서 왜의 쓸모가 이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이유의 유형: 우리가 쓰는 말에는 구조가 있다일반적으로 이유를 대는 행위는 논리적이고 정확할수록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꽤 다릅니다. 스물다섯 살에 영문학과 비교문학 연계 세미나에서 이 책을 텍스트로 다루면서, 저는 오히려 정확한 이유가 대화를 망치는 순간을 수도 없이 목격했고 직접 겪기도 했습니다.찰스 틸리는 인간이 이유를 대는 방식을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관습(convention), 이야기(s.. 2026. 6. 23.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명언 출처, 인용, 오리지널리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스물다섯 살 때까지 명언을 꽤 신봉하는 편이었습니다. 누군가 SNS에 올린 문장에 감동받고, 그걸 노트에 적고, 마치 그 말이 제 삶을 구원해 줄 것처럼 믿었습니다. 그러다 영문학과 비교문학 세미나에서 이 소설을 처음 텍스트 분석 대상으로 만난 뒤로, 명언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홍차 티백 꼬리표 하나에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불편하고, 그래서 더 오래 남는 책입니다.명언 출처, 실제로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이 소설의 핵심 설정은 단순합니다. 일본 최고의 괴테 연구자가 결혼기념일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홍차 티백 꼬리표에 적힌 문장 하나를 발견합니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출처는 괴테. 그런.. 2026.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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