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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노인 (종교적 형식주의, 실존적 자비, 구원의 본질) 신을 만나려면 반드시 성지에 가야 할까요?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이 질문을 처음 마주했을 때, 저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단편 [두 노인]을 수업에서 파고들면서 제가 가진 전제가 완전히 흔들렸습니다. 신을 찾아 먼 길을 떠난 두 노인 중 정작 더 가까이 신에게 닿은 사람은 성지에 도착하지 못한 쪽이었으니까요.종교적 형식주의가 놓치는 것들저는 당시 '19세기 러시아 문학과 후기 빅토리아 시대 도덕주의 소설 비교 비평' 수업에서 이 작품을 분석했습니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과 톨스토이를 나란히 놓고 읽다 보니 하나의 공통 구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종교적 형식주의(Religious Formalism)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종교적 형식주의란 신앙의 본질보다 의식, 규칙.. 2026. 5. 23.
급류 (트라우마, 감성 리얼리즘, 성장 서사) 방황하던 시절, 손에 잡힌 책이 정대건 작가의 『급류』였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그냥 유행 타는 소설이겠거니 했는데, 읽기 시작하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상실과 죄책감을 끌어안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두 청춘의 이야기가, 당시 제 안의 무언가를 정확히 건드렸습니다.트라우마를 공유한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서사이 소설의 출발점은 꽤 묵직합니다. 진평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존경받던 소방관 창석은 계곡 사고 구조에 능해 '진평 물개'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물에서 죽습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이웃집 아들 해솔의 어머니를 껴안은 채로 시신이 발견됩니다. 불륜 관계였던 두 사람이 함께 익사한 겁니다. 창석의 딸 도담이는 어머니가 병실에 누워 있던 그 시간에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죽었다.. 2026. 5. 23.
채식주의자 (폭력의 층위, 에코페미니즘, 의미화) 책을 세 번 읽고도 여전히 뭔가 미끄러지는 느낌이 드는 소설이 있습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그랬습니다.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현대 페미니즘 문학과 신체 정치학(Body Politics)' 수업에서 이 작품을 처음 제대로 마주했을 때, 저는 영혜라는 인물이 도대체 무엇을 향해 무너지고 있는지 수업이 끝나도 한참을 붙잡고 있었습니다.영혜를 둘러싼 폭력의 층위들직접 수업 자료를 들여다보니 이 소설이 '폭력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은 비교적 빠르게 감지됩니다. 그런데 어떤 폭력인지를 층위별로 나누지 않으면 해석이 자꾸 엉켜버립니다. 제가 경험상 이 소설을 처음 읽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걸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첫 번째는 사회적 규범의 폭력입니다. 노브라, 채식, 정신병원을 바라보는 적대적 시선들이 이 폭력.. 2026. 5. 22.
레미제라블 (법과 도덕, 자베르의 붕괴, 장발장의 집착) 영문학 수업에서 처음 이 소설을 원서로 분석하던 날, 저는 솔직히 예상 밖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화로만 알고 있던 레미제라블이, 텍스트로 마주하니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1862년에 완성한 이 작품은 단순한 감동 서사가 아니라, 법과 도덕 사이에서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고 또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 소설입니다.법과 도덕의 충돌, 그리고 자베르의 붕괴제가 직접 강의 노트를 채워가며 가장 오래 붙들었던 인물은 사실 장발장이 아니라 자베르였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악역처럼 보이는 이 경찰관이,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저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불편함의 정체를 이해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자베르는 실정법(Positive Law)의 화신입니다. 여기서 실정.. 2026. 5. 22.
삼포 가는 길 (유랑, 연대, 홈리스네스) 영문학 수업 시간에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처음 제대로 읽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1973년에 발표된 소설이 어쩜 이렇게 지금 제 이야기 같을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성과 경쟁에 지쳐 마음 둘 곳을 잃었던 그 시기에, 눈 덮인 길 위의 세 부랑자가 저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유랑 — 경제적 가난이 아닌 뿌리 뽑힌 존재들의 이야기제가 수강했던 '근대화 시기의 리얼리즘 문학과 소외 계층 서사 연구' 수업에서 이 작품을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와 나란히 놓고 비교 비평하는 과제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교수님이 던진 질문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 인물들은 가난한가, 아니면 유랑하는가?" 처음엔 당연히 둘 다라고 생각했는데, 텍스트를 파고들수록 답이 달라졌습니다.영달은 공사.. 2026. 5. 22.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마르크스주의 비평, 소외, 재개발) 솔직히 저는 이 소설을 처음 교과서에서 마주했을 때 그냥 '수능에 나오는 작품'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정해진 해설, 정해진 감상, 정해진 답. 그런데 영문학 전공 수업에서 원전을 다시 손에 쥐는 순간,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한 번 읽을 때마다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소설입니다.마르크스주의 비평으로 읽은 난장이 가족의 소외제가 이 소설을 제대로 마주한 건 영문학과 '마르크스주의 비평과 근대 노동 문학' 수업에서였습니다. 당시 저는 찰스 디킨스의 빅토리아 시대 소설로 영국 산업화의 인간 소외를 탐구한 직후였고, 같은 시각을 한국 문학에 대입하는 작업이 주어졌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그 과정이 단순한 비교문학 실습이 아니었습니다. 텍스트를 파고들수록 가슴 어딘가가 .. 2026.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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