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88 편안함의 습격 (불편함의 역설, 따분함의 효용, 가짜 허기) 편안함이 인간을 망친다는 말에 처음 반응이 "그건 좀 과하지 않나"였습니다. 그런데 스물다섯 때 세미나에서 이 책을 처음 원전으로 접하면서, 그 반응 자체가 이미 편안함에 깊이 길들여진 증거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전체 역사에서 지금처럼 편안하게 산 시간은 고작 0.03%입니다. 나머지 99.97%는 불편함 속에서 살도록 설계된 몸이 지금 이 안락함을 감당하고 있는 셈입니다.불편함의 역설 — 편안함이 쌓일수록 불만도 함께 쌓인다심리학에 개념 확장 편향(Concept Creep)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개념 확장 편향이란, 문제가 실제로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인간이 더 가벼운 자극까지 위협으로 인식하도록 기준을 낮추는 인지적 패턴을 의미합니다.이걸 실험으로 증명한 사람이 심리학자 데이.. 2026. 6. 14. 그릿 (재능 신화, 성장형 사고방식, 의도적 연습) 재능이 있는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고, 정말 믿으십니까? 저는 스물셋에 군 복무 중 이 질문을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학업이 중단된 공간에서 원서로 읽은 앤절라 더크워스의 그릿은, 재능이라는 환상 뒤에 숨어온 제 자신을 조용히 해부하는 책이었습니다.재능 신화가 만들어온 구조적 착각군대에서 내무반 형광등 아래 앉아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솔직히 첫 장부터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막연히 "노력하면 된다"는 자기계발서의 문법을 기대했는데, 저자는 그보다 훨씬 날카로운 질문을 먼저 던집니다. 왜 우리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에게만 성공의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가, 라고요.더크워스는 교사 시절 IQ가 높은 학생이 성과가 낮고, 상대적으로 평범해 보이는 학생이 눈부신 성장을 이루는 장면을 반복해서 목격했습니다.. 2026. 6. 13. 도어 (타자 지각, 인텔리겐치아, 존엄성) 공부를 많이 할수록 타인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고 믿으십니까? 스물다섯에 저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영문학·비교문학 세미나 수업에서 마그다 사보의 『도어』를 원전으로 읽으며 그 믿음이 완전히 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 소설은 지식인의 선의가 어떻게 폭력이 되는지를,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방식으로 증명합니다.타자 지각: 우리는 타인의 삶을 얼마나 알 수 있는가서울대 인류학과 이현정 교수는 이 소설의 가치를 "읽기 전과 읽은 후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처음에는 다소 과장된 수사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저도 막상 세미나 발표를 준비하면서 비슷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가사도우미 에메렌츠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녀는 고용인이면서도 피고용인처럼 행동하지 .. 2026. 6. 12. 기차의 꿈 (서부 개척 신화, 실존적 고독, 상실의 미학) 2012년 퓰리처상 심사위원들이 "당선작 없음"을 선언하면서도 가장 아깝다고 꼽은 소설이 있습니다. 데니스 존슨의 『기차의 꿈』입니다. 저는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전공하던 스물다섯에 이 소설을 원전으로 처음 읽었고, 그날 밤 강의실에서 느꼈던 서늘함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서부 개척 신화의 이면, 이름 없는 노동자의 궤적소설의 배경은 20세기 초 미국 서부, 급격한 산업화가 대륙을 뒤흔들던 시기입니다. 주인공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고아 출신으로 아이다호의 숲에 보내져 철도 노동자와 벌목꾼으로 살아갑니다. 협곡을 가로지르는 철도 교량을 놓고, 거대한 증기 엔진으로 통나무를 운반하는 노동의 현장이 소설 앞부분을 가득 채웁니다.제가 직접 원전을 읽어보니, 이 장면들에서 데니스 존슨이 구사하는 서술 방식이 독.. 2026. 6. 11. 군주론 (포르투나, 비르투, 국가이성) 솔직히 말하면, 저는 스물다섯이 되도록 마키아벨리를 단순한 '악의 교사'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문학·비교문학 전공 세미나에서 원전을 직접 펼쳐 든 순간, 제가 그동안 얼마나 피상적인 이미지만 붙들고 있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이 글은 군주론이 왜 단순한 권모술수 매뉴얼이 아닌, 현실 정치의 구조를 해부한 근대 정치학의 출발점인지를 제 경험과 함께 풀어 쓴 기록입니다.포르투나, 통제할 수 없는 힘 앞에서르네상스 정치철학과 근대 서사시의 이데올로기를 다루는 세미나에서 군주론 원전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솔직히 첫 몇 장은 그냥 냉소적인 처세술 모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고 변덕스럽다"는 문장에서 잠깐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음 페이지를 넘겨버렸죠.그런데 발표 준비를 위해 당.. 2026. 6. 10. 혼모노 (진짜의 역설, 무당 서사, 악의 건축) 진짜가 되려고 발버둥칠수록 오히려 가짜가 된다면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는 바로 그 역설적인 질문을 정면으로 들이밉니다. 저는 이 책을 학부 세미나 수업에서 처음 텍스트로 다뤘는데, 솔직히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예사롭지 않다는 걸 직감했습니다.진짜의 역설 — 무당 서사가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혼모노(本物)'는 일본어로 '진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어떤 대상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으로도 쓰입니다. 성해나는 이 중의적 단어를 소설 전체의 축으로 삼아, 진짜가 되려는 욕망과 그 욕망이 스스로를 갉아먹는 과정을 무당의 세계를 통해 풀어냅니다.소설의 주인공 문수는 무당 경력 30년의 인물입니다. 유명 정치인의 앞날을 봐줄 만큼 영험하.. 2026. 6. 10. 이전 1 ··· 3 4 5 6 7 8 9 ···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