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72 삼포 가는 길 (유랑, 연대, 홈리스네스) 영문학 수업 시간에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처음 제대로 읽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1973년에 발표된 소설이 어쩜 이렇게 지금 제 이야기 같을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성과 경쟁에 지쳐 마음 둘 곳을 잃었던 그 시기에, 눈 덮인 길 위의 세 부랑자가 저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유랑 — 경제적 가난이 아닌 뿌리 뽑힌 존재들의 이야기제가 수강했던 '근대화 시기의 리얼리즘 문학과 소외 계층 서사 연구' 수업에서 이 작품을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와 나란히 놓고 비교 비평하는 과제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교수님이 던진 질문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 인물들은 가난한가, 아니면 유랑하는가?" 처음엔 당연히 둘 다라고 생각했는데, 텍스트를 파고들수록 답이 달라졌습니다.영달은 공사.. 2026. 5. 22.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마르크스주의 비평, 소외, 재개발) 솔직히 저는 이 소설을 처음 교과서에서 마주했을 때 그냥 '수능에 나오는 작품'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정해진 해설, 정해진 감상, 정해진 답. 그런데 영문학 전공 수업에서 원전을 다시 손에 쥐는 순간,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한 번 읽을 때마다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소설입니다.마르크스주의 비평으로 읽은 난장이 가족의 소외제가 이 소설을 제대로 마주한 건 영문학과 '마르크스주의 비평과 근대 노동 문학' 수업에서였습니다. 당시 저는 찰스 디킨스의 빅토리아 시대 소설로 영국 산업화의 인간 소외를 탐구한 직후였고, 같은 시각을 한국 문학에 대입하는 작업이 주어졌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그 과정이 단순한 비교문학 실습이 아니었습니다. 텍스트를 파고들수록 가슴 어딘가가 .. 2026. 5. 21.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실존주의, 친부살해, 대심문관)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단순한 추리 소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존속살해를 둘러싼 범인 찾기 이야기 정도로요. 그런데 영문학 전공 수업에서 원전을 붙잡고 씨름하면서, 이 작품이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곳을 정교하게 해부한 실존주의 문학의 정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유작이자 집대성이라 불리는 이 소설, 생각보다 훨씬 더 무겁고 날카롭습니다.카라마조프 가문이라는 인간의 축소판이 소설은 1879년부터 1880년까지 러시아 문예지에 연재된 작품으로, 도스토옙스키가 사망하기 불과 1년 전에 완성한 말년의 역작입니다. 탐욕스러운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중심으로, 세 아들인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가 각각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탐색합니다.제가 수.. 2026. 5. 20. 달과 6펜스 (예술가 소설, 실존적 해방, 쿤스트레로만) 증권 브로커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마흔 살의 남자가 어느 날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떠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의 출발점입니다. 저는 영문학 전공 수업에서 이 작품을 처음 원전으로 읽었을 때, 단순한 예술가의 일탈 서사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습니다.예술가 소설(쿤스트레로만)의 계보와 스트릭랜드의 위치쿤스트레로만(Künstlerroman)이란 예술가의 내면적 성장과 창작적 각성을 중심 서사로 삼는 소설 양식입니다. 쉽게 말해 예술가가 어떻게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고 세상과 충돌하는지를 추적하는 장르입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나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가 대표적인 예인데, 몸의 [달과 6펜스]는 이 계보 안에서도 상당히 파격적인 위치를 차지합니.. 2026. 5. 20.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실존적 질문, 방어기제, 리얼리즘) 연애가 권태로워질 때쯤, 우리는 보통 두 가지 선택 앞에 섭니다. 떠나거나, 남거나. 그런데 사강은 그 갈림길에서 아무도 예상 못 한 세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아직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영문학 수업 시간에 처음 이 소설을 펼쳤을 때, 저는 그 질문이 왜 그렇게 폴의 심장을 건드렸는지 단번에 이해했습니다.실존적 질문이 된 짧은 쪽지 한 장영문학 전공 수업에서 "현대 유럽 소설과 심리주의 비평"을 들을 때의 일입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모더니즘 소설을 막 끝낸 직후였고, 저는 사강 특유의 건조한 문체가 처음엔 낯설었습니다. 울프가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즉 인물의 내면을 끊임없이 흐르는 사유의 파편으로 독자를 몰아붙이는 방식이었다면, 사강은 정반대였습니다. 최소.. 2026. 5. 19. 호밀밭의 파수꾼 (배경·맥락, 위선·소외, 실존적 저항) 16세 소년 하나가 네 번째 퇴학을 당하고도 "충격 없다"고 말합니다. 제가 처음 이 장면을 읽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반항이 아니라 체념에 가까운 그 담담함이, 어떤 절규보다 더 크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1951년 발표 이후 지금까지 청춘 문학의 교과서로 읽히지만, 이 소설이 왜 지금도 유효한지는 단순히 '공감 가는 주인공' 때문만이 아닙니다.전후 미국 사회와 홀든 콜필드가 태어난 맥락[호밀밭의 파수꾼]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중산층이 물질적 풍요를 막 누리기 시작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시기를 문학에서는 포스트-워 아메리칸 리터러처(Post-War American Literature), 즉 전후 미국 문학이라고 분류합니다. 여기서.. 2026. 5. 19. 이전 1 ··· 5 6 7 8 9 10 11 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