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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역사적 트라우마, 기억의 서사, 제주 4·3)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전공하면서 홀로코스트 텍스트나 남미의 독재 서사 같은 서구 중심의 역사 소설만 읽어왔던 저에게,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솔직히 예상 밖의 충격이었습니다. 수업 과제로 처음 펼쳤다가, 11페이지쯤에서 책을 덮어버렸으니까요. 이 글은 그 충격의 기록입니다.역사적 배경: 109개의 사라진 마을이 소설을 제대로 읽으려면 먼저 '제주 4·3 사건'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벌어진 이 비극은,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 주민들을 모두 '빨갱이'로 간주하고 학살한 국가 폭력입니다. 그 결과 제주도에서만 무려 109개의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제주공항 활주로 아래에서 발굴된 유골만 3,829구에 달합니다. 제주도 공항 부지가 가.. 2026. 6. 4.
시지프 신화 (부조리, 반항, 무상성)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이해한 척을 했습니다. 비교문학 수업에서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원전으로 분석해야 했는데, 강의 노트는 빽빽하게 채웠지만 마음속엔 물음표가 넘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물음표들이 오히려 저를 살게 해주었습니다.부조리,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진실여러분은 열심히 살았는데도 보상이 없었던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대학원 과정에서 끝없이 쌓이는 학업 압박과 성취 경쟁 속에서 매일 같은 하루를 반복하다가, 어느 날 지하철에서 멍하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다 무슨 의미지?" 카뮈는 그 순간을 "무대 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일"이라고 표현했는데, 제가 경험한 것이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카뮈가 말하는 부조리(absurdity)란, 의미를 갈망하는 인간.. 2026. 6. 3.
사피엔스 (인지혁명, 상상적 질서, 과학혁명)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창과 불'이 아니라 '함께 거짓말을 믿는 능력'이라는 주장,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그렇게 시작부터 독자를 흔들어 놓는 책입니다. 인문학 수업에서 이 책을 원전으로 마주했을 때, 제가 당연하게 여기던 세계의 밑바닥이 흔들리는 느낌이었습니인지혁명: 뒷담화가 문명을 만들었다약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학자들이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라 부르는 이 사건은, 쉽게 말해 인간이 갑자기 '없는 것을 상상하고 그 상상을 타인과 공유하는 능력'을 얻게 된 시점입니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 합의된 바 없고, 일부 생물학자들은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를 가설로 제시하는 정도입니다.. 2026. 6. 2.
신곡 (지옥 구조, 알레고리, 구원 서사)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 중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있다면, 당신은 그게 납득이 됩니까? 중세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어엿한 1단계 지옥 수감자들입니다. 아무리 덕망이 높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전공하며 단테의 신곡을 원전으로 처음 분석했을 때, 저는 이 장면에서 멈춰 버렸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중세 판타지가 아니었습니다.지옥 구조, 단테가 설계한 죄의 해부도신곡(La Divina Commedia)이란 제목 자체가 이미 선언입니다. 여기서 '신(神)'은 작품의 위대함을 뜻하는 형용사로 후대에 붙은 것이고, 원래는 '코메디아(Commedia)', 즉 비참한 시작에서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서사 구조를 가리킵니다. 비극(Tragoedia)이 고귀한 출발에서 파국으로 끝나.. 2026. 6. 1.
걸리버 여행기 (풍자 서사, 야후, 후이넘) 솔직히 처음엔 저도 이 책을 아동용 모험 동화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소인국에 묶인 거인, 거인국에서 애완동물 신세가 된 인간. 거기까지가 전부인 줄 알았으니까요. 영문학 전공 수업에서 원전을 처음 펼쳤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이건 어린이 책이 아니라, 인간 문명 전체를 난도질하는 풍자 서사였습니다.네 개의 공간이 폭로하는 문명의 위선조너선 스위프트가 1726년에 발표한 걸리버 여행기는 단순한 모험담이 아닙니다. 외과의 레뮤얼 걸리버가 네 곳의 이색적인 세계를 항해하며 겪는 이야기인데, 각각의 공간이 18세기 영국 사회의 특정 병폐를 정조준하고 있습니다.소인국 릴리퍼트에서 걸리버는 손가락만 한 12~15cm 크기의 인간들에게 묶인 채 깨어납니다. 이 나라의 권력 다툼은 계란을 넓은 쪽으로 깰 것.. 2026. 5. 31.
코스모스 (코스믹 캘린더, 창백한 푸른 점, 인간 존엄) 우주의 나이 138억 년을 1년 달력으로 압축하면, 인류가 등장하는 시각은 12월 31일 밤 11시 52분이다. 그리고 우리가 쌓아온 과학의 역사 전체는 자정 이전 단 1초에 불과하다. 융합 수업에서 이 수치를 처음 마주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허무함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습니다.코스믹 캘린더가 드러내는 우주의 스케일칼 세이건이 고안한 코스믹 캘린더(Cosmic Calendar)란, 빅뱅(Big Bang)부터 현재까지의 우주 역사를 1월 1일부터 12월 31일로 환산한 시간 축소 모형입니다. 여기서 빅뱅이란 약 138억 년 전 우주가 극도로 높은 온도와 밀도의 특이점에서 팽창하기 시작한 사건으로, 현대 우주론의 출발점입니다.이 달력 위에서 지구는 9월 초에야 겨우 탄.. 2026.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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