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88 아몬드 (감정 결핍, 공감 능력, 인간관계) 공감을 잘 못한다는 게 진짜 문제일까요, 아니면 공감하는 척만 하는 게 더 큰 문제일까요? 손원평의 소설 아몬드를 영어 번역본과 원문을 나란히 놓고 분석하던 날, 저는 그 질문 앞에서 꽤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이 오히려 감정 과잉의 시대를 꿰뚫어 본다는 역설이 그렇게 선명하게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감정 결핍이 폭로하는 것들주인공 선윤재는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을 안고 태어납니다. 여기서 감정표현불능증이란 뇌의 편도체(Amygdala) 크기가 매우 작아 감정을 인지하고 언어로 옮기는 능력 자체가 제한된 상태를 말합니다. 편도체는 공포, 슬픔, 기쁨 같은 정서 반응을 처리하는 뇌 구조물로, 아몬드와 비슷한 모양이라는 이유로 소설의 제목이 됩니다.윤재의 엄마는 아.. 2026. 6. 21. 인터메초 (심리 리얼리즘, 의식의 파편, 간주곡) 소설 한 권이 세미나실에서 저를 밤새 붙잡아 둔 적이 있습니다. 샐리 루니의 [인터메초]였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10살 터울 형제가 각자의 방식으로 무너지고 버티는 이야기인데, 읽는 내내 '이건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누군가다'라는 감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어떤 소설이 독자를 이렇게 잡아끄는 걸까요.심리 리얼리즘, 인물의 내면을 어떻게 이렇게 뚫고 들어오나샐리 루니는 1991년생 아일랜드 작가로,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독자를 확보한 스타 작가입니다. [인터메초]는 그녀의 최신작으로, 국내에서도 이미 [노멀 피플]로 팬층을 형성한 작가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출간 전부터 화제가 됐습니다.제가 영문학 및 비교문학 세미나에서 이 텍스트를 원전으로 다뤘을 때 가장 먼저 직격탄처럼 느꼈던 건 심.. 2026. 6. 20. 그녀를 지키다 (서사 구조, 보호 본능, 실존적 자아) 솔직히 저는 처음에 이 소설을 잘못 읽었습니다. 600페이지짜리 장편을 손에 쥐고 단순한 러브 스토리를 기대했는데, 읽고 나서야 이게 누군가를 '지킨다'는 행위 자체를 해부한 소설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스물다섯의 저에게 꽤 불편한 방향으로 돌아왔습니다.서사 구조가 던지는 첫 번째 신호장 바티스트 앙드레아의 소설 『그녀를 지키다』는 1986년, 한 수도원에서 임종을 앞둔 노인의 시점으로 시작합니다. 수도사들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가운데, 죽은 줄 알았던 그가 갑자기 눈을 뜨고 입을 달싹입니다. 그 문장으로 첫 챕터가 끝나고, 다음 챕터의 첫 문장은 "물론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고 있다"로 시작됩니다. 제가 이 도입부를 처음 읽었을 때, 이건 단순한 액자식 구성이 아니라는.. 2026. 6. 18. 팩트풀니스 (인지편향, 공포본능, 부정본능) 뉴스 앱을 열 때마다 세상이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신 적 있습니까. 저는 스물다섯 무렵, 미디어가 쏟아내는 재난과 갈등 보도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막연한 종말감 같은 것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때 영문학 세미나에서 원전으로 읽게 된 책이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였고, 그 책은 제 세계 인식 방식을 꽤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습니다.침팬지보다 낮은 정답률이 말해주는 것 — 인지편향의 구조한스 로슬링은 전 세계 12,000명을 대상으로 세계의 현황을 묻는 3지선다 문제 12개를 출제했습니다. 응답자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도 있었고, 각국의 정치인과 대기업 CEO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평균 정답 수는 2개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위로 찍는 침팬지라면 수학적으로 4개를.. 2026. 6. 17. 경험의 멸종 (직접 경험, 간접 경험, 디지털 소외)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느낌, 혹시 여러분도 경험해보셨습니까? 저는 어느 순간부터 밥 먹을 때도, 잠들기 직전에도, 줄을 기다리는 2분 동안에도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은 바로 그 불편한 자각을 정면으로 파고드는 책입니다.직접 경험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정말 '겪고' 있는가인간이 수백만 년에 걸쳐 쌓아온 경험의 방식은 단순했습니다. 특정 시간, 특정 공간 안에서 몸과 감각을 통해 무언가를 체험하는 것. 크리스틴 로젠은 이것을 직접 경험(direct experience)이라 부르며, 이 방식이 지금 급격히 소멸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저도 비슷한 고민을 전공 수업 시간에 처음 마주쳤습니다. 당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복수 전공하며 '포스트.. 2026. 6. 16. 이처럼 사소한 것들 (빌 팔롱, 실존적 용기, 막달레나 수녀원) 스물다섯 살 때 수업에서 알라스테어 험프리스의 [편안함의 습격]을 읽으며 '안락함이 인간을 어떻게 잠식하는가'를 학문적으로 파고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과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제 머릿속에서 겹쳐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옳은 일을 할 수 있는가.빌 팔롱이라는 인물과 실존적 용기의 구조솔직히 이 소설을 처음 펼쳤을 때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석탄을 배달하는 남자의 이야기라는 설정이 이렇게까지 묵직하게 읽힐 줄 몰랐거든요. 주인공 빌 팔롱은 아이린이라는 아내와 다섯 딸을 둔 평범한 노동자입니다. 매일 새벽 어둠 속에 출근해서 석탄을 나르고, 밤늦게 돌아와 잠자리에 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밤마다 잠을 못.. 2026. 6. 15. 이전 1 2 3 4 5 6 7 8 ··· 15 다음